-
돌멩이를 쥐고 이승희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우나 봅니다. -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 2006), 23쪽 이승희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7년 『시와 사람』 「집에오니 집이 없다」 발표 1999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5.19 10:24
-
춘하추동 하종오 지방 소도시 임대 아파트 단지 공원 정자에북한에서 탈출한 여인들이 모여 앉아 웅얼거리면베트남에서 시집 온 여인들이 모여 앉아 재잘거리면서로 못 본 척했다 북한 출신 여인들은 겨울이면 바람 속에서베트남 출신 여인들은 여름이면 햇볕 아래서은근히 고향 집을 그리워한다는 걸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북한 출신 여인들과 베트남 출신 여인들은꽃들 수런거리는 소리와 잎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는지봄가을엔 집집마다 창문을 열고 멀리 내다보았다 지난날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았던 점이 같고지금 한국에서 지방 소도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4.19 10:14
-
우연한 감염 허수경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답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4.07 16:23
-
한여름 동물원 김개미 안녕, 기억에 사로잡힌 앵무새야안녕, 검은 바위에 꽃핀 이구아나야안녕, 편도선이 부은 플라밍고야안녕, 환청에 들뜬 원숭이야안녕, 돌을 집어먹은 코끼리야안녕, 눈동자에 시계를 가둔 고양이야안녕, 버저를 눌러대는 풀매미야안녕, 안녕, 안녕, 오늘의 태양을 기억해두렴죽기도 살기도 좋은 날씨란다 -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문학동네, 2017), 12쪽 김개미(김산옥) 1971년 강원도 인제 출생 2005년 『시와반시』 신인상 등단 2010년 『창비어린이』 동시 등단 2012년 『어이없는 놈』 제1회 문학동네동시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3.29 10:47
-
오메가들이 운집한 이상한 거리의 겨울 김미령 겨울 점퍼 모자 달린 겨울 점퍼 모자에 털 달린 겨울 점퍼 모자에 굶주린 들짐승이 달린 겨울 점퍼 털 테두리 안의 까만 얼굴 암컷 테두리에 둘러싸인 까만 얼굴 테두리가 풍성할수록 까만 얼굴이 잘 메워지고 뿌연 하늘에 굵은 눈발이 몰아치고 얼굴은 동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겨울을 기다렸어요 언제나처럼 커다란 동그라미를 공중에 그렸어요 선천적으로 우리는 견디는 것을 숭배했어요 동그라미들이 모여서 일제히 어디론가 향한다 더 깊은 동굴 안을 향한다 동그라미들이 겹친다 화재경보기 옆에서 키스를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3.22 11:18
-
빨간 임솔아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먹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에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3.17 15:24
-
말라리아 서윤후 나 죽어도 돼? 죽음을 허락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여름이 찾아왔다 님프의 동굴을 헤매다가 더위를 맞이하는 일은 곧 천천히 죽어가는 것 홍조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은 고삐를 물고 여기저기 머리를 들이밀며, 우스운 병도 쉽게 잊기로 한다 저물녘에 꾼 꿈들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가끔 물방개 튀어 오르는 소리에 놀라겠지만 버려진 신발을 찾아 헤맨다 가랑비를 기다리며 목구멍을 벌리고 있는 목숨을 생각한다 혀를 보여 준다는 것은 비밀이 늙어 가는 일 아이들은 손잡고 숲을 거닐며 감염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서로를 사랑하지도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7.03.08 18:12
-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김소연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2.29 09:52
-
개종 5 황인찬 여름성경학교에갔다가 봄에돌아왔다 -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96쪽 황인찬 1988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시집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수상 2012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 대학생 때 친구가 회사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회사에 볼일 있다고 잠시 같이 가자는걸 따라 갔다가 그날 밤늦게 건물에서 나온 적이 있다. 무슨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해 설교하는 자리였다. 믿음이 필요한 곳이었다.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2.21 09:45
-
달 구렁이와 꽃달 이병일 조릿대 수풀 속에서 어미의 생을 탁본하는 밤우리는 붉은 비늘과 가시 뼈를 뒤집어쓰고어미의 몸속에서 말갛게 젖은 눈동자를 굴리는해와 달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유연하고 가느다란 물불의 관성으로 빚어졌으니그날부터 우리는 별똥무늬 어미의 몸에서징그럽도록 아름다운 태몽에 시달렸고물비린내 나는 서로의 피에 뒤엉켜 춤을 추곤 했다 달무리 뜨고 지는 밤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어미의 몸은 한뼘씩 땅속으로 꺼져나갔고급기야 어미의 혼만이 우리를 날름날름 핥다가친친 휘감아 안았다 그때마다 꽃과 별과 달이등허리에 어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2.16 11:29
-
개화 류경무 봄날 꽃들의 속내를 나는 알지 못하지 머리에 꽃을 꽃은 여학생이나 커리 냄새를 풍기며 꽃나무 아래 앉은 이주 노동자들이 들뜨는 이유에 대해서 지금껏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지 그것은 그저 즐기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서 내가 지금 꽃나무 아래 앉은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지나치게 통속적이거나 분분히 꽃이 피거나 지는 그렇고 그런 일이라네 그래서 나는 이제 꽃의 속내와 같은 위험한 생각은 잊기로 했네 단지 오답의 형식을 지닌 수많은 숭고함에 대해 꽃처럼 맞서기로 했지 내가 먹었던 음식의 맛을 나만이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2.08 17:21
-
편지 심보선 이곳은 오늘도 변함이 없어태양이 치부처럼 벌겋게 뜨고 집니다나는 여느 때처럼 넋 놓고 살고 있습니다탕진한 청춘의 기억이간혹 머릿속에서 텅텅 울기도 합니다만나는 씨익,웃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씨익,한번 웃으면사나운 과거도 양처럼 순해지곤 합니다 요새는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어젯밤엔연속되는 실수는 치명적인 과오를여러 번으로 나눠서 저지르는 것일 뿐,이라고 일기장에 적었습니다적고 나서 씨익,웃었습니다언어의 형식은 평화로워그 어떤 끔찍한 고백도 행복한 꿈을 빚어냅니다어젯밤엔 어떤 꿈을 꾸었는지기억나지 않습니다만행복한 꿈이었다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2.01 13:25
-
사육제페토일 등급 고삼겹살을 접시로 내올 때에비명은 담지 않았습니다다소 불쾌한 전류의 저릿함도담지 않았습니다거꾸로 매달려 쏟은 선지도담지 않았습니다적당히 피를 머금어 때깔 좋은 그것에농장에서 나던 날 밤의 멋모르는 평온함만을고스란히 담아내었습니다그러니 세상이여, 너무 미안해하지 마십시오이들은 아직 사람이 아닌걸요맛있게 드십시오둘이 먹다하나는 죽을 것이고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 『그 쇳물 쓰지 마라』 (수오서재, 2016), 138쪽제페토 2010년 9월 16일, ‘당진제철소에서 20대 청년이 용광로에 빠져 사망’ 이라는 기사에 쓴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1.25 11:00
-
화가의 방 유희경 그 책장 가장 어둔 구석에 꽂혀 있는 책은 아무도 읽은 적 없는 한 화가의 생애 그는 한 칸의 방을 그리기 위해 일생을 걸었고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어둡고 비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은 자신의 방 안을 생각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꽃 그 속에는 빈 어머니와 빈 동생들과 빈 뒷모습 빈 그림자 빈 원망이 흔들린다 어디서 무거운 소리가 들리고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시커먼 시간이 찾아온다 누가 생의 무게를 재어보는가 나는 내 방 구석 책장으로 걸어가 한 권의 책을 꽂아 넣으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1.16 10:30
-
다움 오은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 돼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 돼대신, 맞으면 두 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 해야 해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받아쓰기는 백 점 맞아야 해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 돼거짓말은 하면 안 돼 꿈을 가져야 해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 돼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영어는 잘해야 해사사건건 따지려고 들면 안 돼필요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1.09 15:56
-
음지와 양지의 판다 이제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 밤 허리가 부러져 누워 있을 때, 어둠은 최초의 어둠으로 다가왔고, 최초의 어둠 뒤에는 최초의 빛이. 그리고 저 천장 귀퉁이에선 나의 작고 어린 판다가. 천천히 모서리를 타고 내려오면서, 어이 잠들지 않으면 죽는다. 이제 그만 받아 들여. 이 시간을, 이 공간을. 판다는 태어나기 전에도 판다였다는 듯이 흑백의 색을 단단히 뒤집어쓴 채 단순하고도 명료한 삶을 설파하는 사람처럼 나는 누워서 움직일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판다여, 판다여, 하며 체념하듯 판다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1.03 09:18
-
미란타 1 유하 지하철에서 아침 신문을 보다 일순 가슴이 덜컥했어죽은 독재자가 대문짝만하게 나를 노려보며잔뜩 무게를 잡고 앉아 있더군 정, 신차리고 보니까그 독재자와 닮은 용도 때문에 단단히 한큐 잡은탤런트가 위장약 선전을 하는 광고란이었어나도 위장병으로 몇 개월 시달려봐서 아는데쓰린 속을 달래는 데는 단연 미란타가 따봉이지헐은 위벽을 순식간에 땜빵해주는 하얀 액의 위장약근데 어느 날 의사가 미란타의 장복을 말리는 거야식이요법 같은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그 약의 효과는 극히 일시적이라는 거지아니, 오히려 위를 더욱 해칠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0.26 17:10
-
살 2 김사람 正常位를 모르는 남자를 아시오? 상상 체위는 유쾌하오. 이바가 나를 안으오.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팬티를 내렸을 때 바람이 불었소. 할머니는 방에서 나를 받았소. 딸 딸이오! 거북이 같은 눈으로 이목구비를 살피고, 손가락 발가락을 확인했소. 수건으로 피를 닦아낸 후라야 구멍이 막혀 있다 말했소. 어머니는 아담의 생식기를 처음 봤을 때의 하와처럼 눈을 껌벅거렸소. 나는 질 없이 태어났소. 지금은 남자라오. 처음부터 남자였던 것 같소. 생식기가 엉덩이 바로 위에 달려 있소. 소변을 보더라도 대변기가 놓인 곳에 들어가야 한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0.20 13:46
-
당나귀 송찬호 이런 집이 있다 구름 안장만얹어놓아도 힘들다고등이 푹 꺼지는 게으른 집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갑다고방울 소리 울리는 늙고 꾀 많은 집 그래도 그것을 집이라고 나는,생활을 고삐에 단단히 매둘 요량으로집 앞 물가에 버드나무도 한 그루 심고나귀가 좋아하는 호밀의 씨도 뿌렸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호밀 한 자루 팔아 거위를 사고거위를 팔아 양을 사고양을 팔아 구름을 사면언제 그런 부귀의 구름 위에 사는 날이 오기는 할까 벌써 버드나무는 지붕보다 높이 가리고바람은 날마다 호밀의 귀를 간질이는데아직도 이런 집이 있다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0.12 13:47
-
비정성시(非情聖市) 김경주 비 내리는 길 위에서 여자를 휘파람으로 불러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아무리 멋진 휘파람으로도 오지 않는 양이다 어머니를 휘파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간호사를 휘파람으로 불러 세워선 안 된다 이것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것이 내가 여기 들어온 경위다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음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해가 뜨면 책을 덮고 나무가 우거진 정원의 구석으로 가서 나는 암소처럼 천천히 생각의 풀을 뜯을 것이다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박영민
2016.10.07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