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감염
허수경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답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린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58쪽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경상대학교 국문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학 고대근동고고학 박사
저서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 1988)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작과비평사, 2001)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기타
소설 『모래도시』 (문학동네, 1996)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문학동네, 2003)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현대문학, 2005)
● 나의 존재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면, 나로부터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 탓이오’ 하고 가슴을 세 번 치는 것은, 교만한 탄식이 된다. 내가 태어나는 모습을 선택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내가 어떻게 살아질지 선택할 수 있는 이도 없으며, 심지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아는 이는 더더욱 없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발생했고, 발생한 운명대로 살아진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환경 속에서 설계된다. 내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행동들도,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속한다. 우리보다 높은 차원에서 보았다면 삶은 늘 예측 가능했을 것이다. 개미의 생애를 관찰하듯이. 개미는 자신의 생애를 관찰할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을 모르고, 모르는 세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세상도 우리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어떻게 존재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었을까. 나와 다른 얼굴들은 모두 나였을 수 있는 얼굴들이다.
관여하지 않는 것은 외면한다는 말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른다. 바이러스처럼 묻어나고 나도 모른 채 소독되어버리는 일생들은.
박영민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 문예지 『더 해랑』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