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임솔아
사슴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갈지자로 뛴다
는 말을 들었다. 먹히지 않으려고
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먹고 싶다
는 말을 들었다.
*
목소리는 어디까지 퍼져나가 어떻게 해야 사라지
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면 눈알이 붉어졌다 고통에
색이 있다면 그 색으로 나는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다면 창문을 넘어 번져가 창밖의 은
행나무와 횡단보도와 건너편 건물의 창문까지 부글
부글 타오르는(창문을 열어줘) 저것을 나는 고통의
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의 피가 빨갛다는 말을
믿고 있다 새빨간 태양이 떠오를 때처럼 점점 눈이
부시다
살인자에게서도 기도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나의
한 줄 일기와
당신들이 자살하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 사이를 헤
맬 것이다.
*
이곳으로 가면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어야 한다
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벌거벗은 채 발목을 잡히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매를 맞고
처음으로 울어야만 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말해지는 동안
믿어본 적 없는 소원이 이루어진다.
고통을 축하합니다.
빨간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른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 지성사, 2017), 122쪽
임솔아
1987년 대전 출생
한국종합예술학교 서사창작과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YAF 우수작가 선정
시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 지성사, 2017)
소설
『최선의 삶』 (문학동네, 2015)
● 어떤 짐승들은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도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다. 얌전한 초식인간으로 길러진 사람들을 우리는 ‘을’이라고 부른다.
좋은 고기를 얻으려면 거세를 하는 것이 좋다. 순결과 정숙은 거세의 언어이다. 육식인간들은 밤마다 스타킹 파티를 한다. 겸손과 분수 앞에 잘려나간 우리가, 그 누가 시바스 리갈을 단죄하겠나.
육질 부드러운 우리는 부드러운 사회생활을 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든다. 마블링이 아름다운 글래머가 참 먹음직스럽다.
태어나자마자 맞고 살았다. 퇴근을 못한 사람들은 항상 안구 건조증에 시달리고 있다.
초식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초식인간의 습성대로 살고, 육식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육식인간의 습성대로 산다. 우리는 영원히 육식인간이 될 수 없고, 다만 좋은 고기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좀 더 많은 사료를 먹을 수 있는 길이다.
박영민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 문예지 『더 해랑』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