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타 1
유하
지하철에서 아침 신문을 보다 일순 가슴이 덜컥했어
죽은 독재자가 대문짝만하게 나를 노려보며
잔뜩 무게를 잡고 앉아 있더군 정, 신차리고 보니까
그 독재자와 닮은 용도 때문에 단단히 한큐 잡은
탤런트가 위장약 선전을 하는 광고란이었어
나도 위장병으로 몇 개월 시달려봐서 아는데
쓰린 속을 달래는 데는 단연 미란타가 따봉이지
헐은 위벽을 순식간에 땜빵해주는 하얀 액의 위장약
근데 어느 날 의사가 미란타의 장복을 말리는 거야
식이요법 같은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약의 효과는 극히 일시적이라는 거지
아니, 오히려 위를 더욱 해칠 수가 있대
그쪽 방면은 문외한이지만 그 말이 얼른 이해가 되더만
고통을 호소하는 위의 입을 콘크리트쳐버리면
당장 침묵하겠지만 그게 어디 오래가겠어
한데 말야, 삼천만이 개운한 기분으로 펼쳐드는 아침 신문에
오랜 위통처럼 만인을 괴롭히다 죽은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
아무런 미안타는 기색도 없이 미란타를 권하는 이 현실을,
이따금 재발하는 위염의 쓰린 기운처럼 곰곰이 씹어대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고리짝 철 지난 약 선전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었어
그래도 보릿고개 때 생긴 위장병을 잡은 분이 바로 그 분 아니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 문학과 지성사, 1991 ) 33쪽
유하
1963년 전북 고창 출생
1988년 『문예중앙』에 「무림일기」로 등단
세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영상정보통신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
시집
『무림일기』 (문예중앙, 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문학과 지성사, 1991)
『안 이쁜 신부도 있나 뭐』 (세계사, 1991)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1995)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2007)
『천일馬화』 (문학과 지성사, 2000)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문학동네, 1995)
영화
《시인 구보씨의 하루》 (1990, 단편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1993)
《Face Death》 (1999, 단편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2001)
《몰락 취미를 꿈꾸다》 (2002, 단편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2004)
《비열한 거리》 (2006)
《쌍화점》 (2008)
《하울링》 (2012)
《강남 1970》 (2015)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소원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3세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죽은 자는 현실에 개입할 수 없다. 이 규칙은 죽은 자가 현실에 돌아와도 적용된다. 현실에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때부터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욕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이 살아나 정신적 욕망을 품으면 유령이나 원귀가 되고, 육이 살아나 육체적 욕망을 품으면 좀비나 워킹데드가 된다. 죽은 몸이 현실에 살아왔으니 부패가 멈추지 않는다. 썩어가며 진물이 흐르고, 끊임없이 살아있는 것들을 잡아먹으려 든다. 그래서 청년이 힘든 시대인가보다.
대국적인 날이다. 안중근과 김재규와 손석희를 생각한다. 그리고 YH 사건을 생각한다. YH 사건을 생각하며, 모든 크고 작은 갑들의 대국적인 경영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