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
서윤후
나 죽어도 돼?
죽음을 허락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여름이 찾아왔다 님프의 동굴을 헤매다가
더위를 맞이하는 일은 곧 천천히 죽어가는 것
홍조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은
고삐를 물고 여기저기 머리를 들이밀며, 우스운 병도 쉽게 잊기로 한다
저물녘에 꾼 꿈들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가끔 물방개 튀어 오르는 소리에 놀라겠지만
버려진 신발을 찾아 헤맨다
가랑비를 기다리며 목구멍을 벌리고 있는 목숨을 생각한다 혀를 보여 준다는 것은 비밀이 늙어 가는 일
아이들은 손잡고 숲을 거닐며 감염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서로를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피가 섞였어
손만 잡고 놀았는데 돌림병이 나돌았지 곪아서 옮아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축제가 끝나고 예보를 전한다
곧 비가 올 건가 봐, 우중충해졌어
네 얼굴이
-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사, 2016) 61쪽
서윤후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현대시』 신인추천으로 등단
저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사, 2016)
『나는 여전히 시 쓰기가 재미있다』 (서랍의 날씨, 2016)
『방과 후 지구』 (서랍의 날씨, 2016)
●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그가 구원이 되어 다가왔다. 마음을 여는 사이가 되자 이내 죽고 싶었던 마음을 마구 쏟아낼 수 있었다. 나는 늘 죽고 싶었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을 쏟아내곤 했던 것이다.
늦여름은 늘 잊어버린 계절이 되곤 한다. 아마도 흑역사였을 - 이제는 지나가버린 폭우를 생각한다. 열병은, 죽음을 향해 달린다. 뜨겁고, 후텁지근하고, 불쾌하고, 답답하다. 늦장마 늦매미 늦사랑 온갖 늦어버린 것들 속에서 울었다. 한바탕 폭우가 지나가고 나면, 이미 죽고 싶은 마음은 다 쏟아져 버렸으므로, 나는 더 이상 쏟아낼 것이 없어졌다. 질척질척한 그는, 젖은 수건처럼 불쾌했기에 나는 그 계절을 떠났다.
이제는 잘 말린 가을 같은 또 다른 그가 보송보송하게 앉아있다. 한번씩 습도가 높고 땀이 차오를 때면, 우중충하게 녹아내리던 거울 같은 그가 생각난다.
박영민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 문예지 『더 해랑』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