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와 양지의 판다
이제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 밤 허리가 부러져 누워 있을 때, 어둠은 최초의 어둠으로 다가왔고, 최초의 어둠 뒤에는 최초의 빛이. 그리고 저 천장 귀퉁이에선 나의 작고 어린 판다가.
천천히 모서리를 타고 내려오면서,
어이 잠들지 않으면 죽는다.
이제 그만 받아 들여. 이 시간을, 이 공간을.
판다는 태어나기 전에도 판다였다는 듯이
흑백의 색을 단단히 뒤집어쓴 채
단순하고도 명료한 삶을 설파하는 사람처럼
나는 누워서
움직일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판다여, 판다여, 하며
체념하듯 판다를 판다라고 불러보는 것인데
시간은 흐르고 가망은 없고
소망 뒤에는 불행이 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동안
구원이 필요한 순간에 가장 부족한 것은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이국의 밤은 찾아오고 허락하지 않은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이후의 아침은 까마득히 더디기만 하고
잠들지 않으면 죽는다기에,
잠들었다 깨었다, 깨었다 잠들었다,
병상의 이불 위로 흰 빛은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하고, 나는 음지가 되었다가 양지가 되었다가,
이러다가 사람들은 천장 모서리를 따라 흐르는 음지와 양지의 판다를 발견하는구나. 이러다가 사람들은 음지와 양지의 두 눈을 발명하는구나. 따뜻한 입말을 불러내듯 제 뼈마디의 구멍을 들여다보게 되는구나.
어느새 내 어린 판다는
자신의 삶을 수긍하는 사람의 선한 눈길을 빼닮고
봄날 동물원의 한가로움을 가장한 채로 눈부시고
검고 흰 빛을 바라보며 무수한 밤을 지나올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로 남겨두기로
머나먼 봄의 초원에서 누군가 무언가 한가로이 풀을 뜯을 때, 다시 하루는 음지에서 양지로, 양지에서 음지로 이름을 바꾸고,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 지성사, 2014) 54쪽
이제니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페루」로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 지성사, 2014)
수상
2011년 제21회 「편운문학상」 (우수상)
2016년 제2회 김현문학패 수상
●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판다는 것은 무엇일까. 판다는 네가 산다는 나를 만나러 온다. 너는 우울과 좌절과 절망과 고통과 속박의 음지 속에서, 스믈스믈 기어올라 나를 만나러 온다. 삶을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나는 오히려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죽을 것이다.
욕망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다. 잡으려고 할수록 잡지 못한다. 일어나려고 할수록 일어날 수 없다. 가라앉지 않으려면 가라앉게 두어야 한다. 무너지는 구멍을 들여다본다. 불타는 뼈를 본다, 으스러지는 뼈를 본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라앉은 몸 위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음지가 오고 양지가 간다.
가라앉고 가라앉아야 한다. 놓고, 놓아야 한다. 불타는 뼈 위로 판다가 지나간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두고 나면 조용한 우주가 보인다. 봄날 동물원의 한가로운 오후가 떠오른다. 수많은 밤이 흐르고서야, 음지와 양지가 흐릿하게 보인다.
가라앉을 때는 붙잡으려고 하지마라.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평화롭게 가라앉은 채로 수많은 날이 흘러야 한다. 그래야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