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움
오은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
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
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 돼
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 돼
대신, 맞으면 두 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 해야 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
받아쓰기는 백 점 맞아야 해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
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
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
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 돼
거짓말은 하면 안 돼
꿈을 가져야 해
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 돼
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
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
영어는 잘해야 해
사사건건 따지려고 들면 안 돼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돼
대신, 정말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야만 해
가족을 지켜야 해
학점을 잘 받아야 해
꿈을 잊으면 안 돼
대신, 현실과 타협하는 법도 배워야 해
돈 되는 것을 예의 주시해야 해
돈 떨어지는 것과 동떨어져야 해
내 주변 사람들에겐 항상 친절해야 해
대신, 나만 사랑해야 해
나한테만 베풀어야 해
뭐든 잘해야 해
뭐든 잘하는 척을 해야 해
나를 과장해야 해
대신, 은은하게 드러내야 해
적당히 웃어넘기고 적당히 꾀어넘길 줄을 알아야 해
눈치를 잘 살펴야 해
눈알을 잘 굴려야 해
다움은 닳는 법이 업었다
다음 날엔 다른 다움이 나타났다
꿈에서 멀어진 대신,
대신할 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죽을 때가지 지켜야 하는 비밀처럼
다움 안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79쪽
오은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작란(作亂) 동인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민음사, 2009)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난다, 2012)
연구서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살림, 2009)
● 듣는 귀는 두 개인 대신 말하는 입은 수천이었기에, 나도 끊임없이 말해야만 했다. 과묵은 주먹이 두꺼운 이에게만 허락된 사치였다. 비열함이 정의로움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어깨를 당당히 펴고 눈치를 보며, 입이 무겁게 아부를 하는 것이 남자다움을 표상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효율적인 도구가 되고야 말겠다고 끊임없이 자기 꿈을 다짐했다. 깊이 있는 생각은 쓸모없는 생각이 되었고, 생각이 일차적일수록 사려 깊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현실을 잘 안다고 할수록 현명한 이로 존중받게 되었다.
붕붕거리는 벌떼를 보다가, 왱왱 거리는 모기를 보다가, 컹컹거리는 개떼를 보다가, 종알거리는 티비를 보다가,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갔다. 첫눈에 반한 애인이 마침 직장이 좋았다. 밝고 명랑하고 행복한 가정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