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방
유희경
그 책장 가장 어둔 구석에 꽂혀 있는 책은 아무도 읽은 적 없는 한 화가의 생애 그는 한 칸의 방을 그리기 위해 일생을 걸었고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어둡고 비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은 자신의 방 안을 생각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꽃 그 속에는 빈 어머니와 빈 동생들과 빈 뒷모습 빈 그림자 빈 원망이 흔들린다 어디서 무거운 소리가 들리고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시커먼 시간이 찾아온다 누가 생의 무게를 재어보는가
나는 내 방 구석 책장으로 걸어가 한 권의 책을 꽂아 넣으려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조각난 햇빛을 보고 있다 또한 화가가 그리지 못한 그 방은 스스로 얻은 무채색의 두려움을 삼키고,좀더 어두운 곳에 숨을 것이다
-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 지성사, 2011), 46쪽
유희경
1980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졸업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티셔츠에 목을 넣다가 생각한다」로 등단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 운영자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 지성사, 2011)
● 백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다 갔지만, 위인전집에 소개되는 사람은 백 권을 넘지 않는다. 우리는 읽히지 않는 인생을 마치 누가 읽어 줄듯이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얼마나 읽어 보았나. 자기 인생의 진정한 독자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지만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양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읽고 있는 독자가 생기면 불편해 하고 어려워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예쁜 표지디자인을 준비했고, 거기까지가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다. 그저 그 정도면 구매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햇볕이 들어온다. 시간이 탈색되고 있다. 무채색이 되고 있다. 무화되고 있다. 비어있는 불꽃, 비어있는 원망, 비어있는 열정, 비어있는 기억, 무엇 때문에 먹먹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나면, 망각의 어둠이 찾아온다.
우리는 우리가 실패작이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슬쩍슬쩍 덧칠을 해 가며 누더기가 되어간다. 처음엔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도 잊은 채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완성작을 만들어 간다. 우리는 신이 인생을 캔버스 삼아 진실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버려진 실패작일지도, 혹은 그저 구상을 한번 해보고 버린 습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화실 속에 이리저리 버려진 아무 주목받지 않는 그림일지라도, 우리는 화실의 한 풍경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완성도가 높진 못해도, 신의 실력이 발휘된 소중한 창조물임에는 틀림없다. 당대에는 버려졌던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스케치처럼, 습작인 우리도 멋진 완성작을 위한 준비일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