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김소연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밟는 별들과 오다 만난 유성우들은 제발 좀 따돌리고 너 혼자 유령처럼 와주실래요 내 몸은 너무 오래 개기월식을 살아온 지구 뒤편의 달, 싸늘하게 식었을 뿐 새가 가지를 털고 날아만 가도 요란을 떠는, 풍화도 침식도 없는 그늘입니다. 뜨거운 속엣것이 고스란히 보존된 광대한 고요란 말입니다 춥습니다
칼을 들어 한 가지 표정을 새기느라 또 한 세기를 보냈습니다 나를 비출 거울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난자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 보았습니다 한 가지 표정이기를 바랍니다 피를 너무 흘려 몸이 좀 싸늘합니다 냉기 가득한 살갗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반가워 죽겠습니다
쥐똥나무 꽃향기가 지독해서 귀를 틀어막고 누워 있습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이 별에는 더위가 시작될 겁니다
너는 지금 간신히 내 몸 속에 도착해 있습니다 해수의 밀도는 낮아집니다 간빙기를 끝내는 소리가 지구 바깥에서 우렁찹니다 깊은 땅속이 먼저 뜨거워지고 빙산은 모든 것을 묵인하고 버티려다 쩍쩍 갈라져 천둥 같은 울음을 보냅니다 눈물이 이토록 범람하면 지형이 곧 바뀔 겁니다 내 몸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서로 부딪쳐 얼음 멍이 들고 있습니다 무정할 수는 없는 순간입니다
- 『눈물이라는 뼈』 (문학과 지성사, 2009년), 25쪽
김소연
1967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사, 1996)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
『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사, 2009)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수상
2010년 《노작문학상》 수상
2011년 《현대문학상》 수상
● 항성이 그 온기를 잃고 나면, 왜성이 되어 서서히 식어가게 된다. 상실은, 온기를 잃어가는 것이다. 식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하며 살고, 상실한 채 산다. 의미가 사라진 삶, 죽음의 유예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무의미와 권태의 연속된 하루가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삶은 권태로운 소모 외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므로, 한 세기 후의 유서를 오늘 쓴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상실당한 사람들은 늘 허기진 삶을 살아가게 된다. 꿈, 희망, 행복, 사랑 같은 것들로 헛배를 채워가며 산다. 세련된 말잔치의 반복이다. 이왕이면 더 세련될수록 좋다. 달콤하다. 초콜릿으로 잠시 기분을 때워가며 견디는 하루가 반복된다.
그늘진 곳에 쌓인 눈은 봄이 늦도록 녹지 않는다. 온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일년 내내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 쓸데없는 조명을 햇볕이라고 속이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녹일 수 없을 것이다. 얼어 있다는 것은, 겨울 그대로란 뜻이다. 그러므로 온기를 잃어버린 이들은 늘 어제를 살고 있다. 누구나 평생 동안 자기의 표정을 조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인생이지만, 어제를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난자하는 칼질로 표정을 조각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가 흐르는 존재만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피는 고통이면서, 삶의 온기이므로, 고통은 온기를 잃지 않았음을 한없이 반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냉동인간은 내일의 활화산이다. 분출되지 못한 생의 에너지가 가슴 속에 마그마처럼 용솟음치고 있다.
이미 다 타버린 왜성도, 새로운 에너지원이 나타나면 이따금 초신성 못지않은 폭발을 하며 존재를 드러낸다고 한다. 살고 싶어서 아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