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심보선
이곳은 오늘도 변함이 없어
태양이 치부처럼 벌겋게 뜨고 집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넋 놓고 살고 있습니다
탕진한 청춘의 기억이
간혹 머릿속에서 텅텅 울기도 합니다만
나는 씨익,
웃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씨익,
한번 웃으면
사나운 과거도 양처럼 순해지곤 합니다
요새는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어젯밤엔
연속되는 실수는 치명적인 과오를
여러 번으로 나눠서 저지르는 것일 뿐,
이라고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적고 나서 씨익,
웃었습니다
언어의 형식은 평화로워
그 어떤 끔찍한 고백도 행복한 꿈을 빚어냅니다
어젯밤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행복한 꿈이었다 굳게 믿습니다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지만
이제 삶의 고통 또한 장르화하여
그 기승전결이 참으로 명백합니다
다만 어두움을 즐겨하기에
눈에 거슬리는 빛들에겐
좀 어두워질래? 타이르며
눈꺼풀을 닫고 하루하루 지낸답니다
지금 이 순간 창밖에서
행복은 철 지난 플래카드처럼
사소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그 아래 길들이 길의 본질을 망각하고
저렇게 복잡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의 페이지들이 구겨지면서
아이구야, 아픈 소리를 냅니다
-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 2011), 134쪽
심보선
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동대학원 석사.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
2009년 16회 김준성 문학상 수상
2011년 제 4회 올해의 좋은 시 상, 11회 노작문학상
인문예술잡지 F 편집위원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초』 (문학과 지성사, 2008)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 2011)
● 우리나라는 인권국가이므로, 사형판결이 났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무기징역을 살게 된다. 이에 발맞춰, 자기 인생에 사형 선고를 내렸더라도 이제는 무기징역을 사는 게 좋겠다. 자신에게 내리는 사형, 개전의 정이 없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격리되어 떠나가라.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곳으로.
어차피 없어진 것들이므로 이왕이면 과거는 행복했다고 믿어보자. 하지만 이것은 형벌. 스스로에게 내리는 무기징역이니만큼 죽을 때 까지 부끄러워하며, 반성하고 뉘우쳐야 한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어둑하게 살아야 마땅하다. 과거를 버리고 갱생하는 하루.
소말리아 해적들이, 한국의 감옥 생활을 행복해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북유럽의 수감 시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니 현실 속에서 떠나고 싶은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싶을 때,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자. 인권 세상이니까. 현실보다 더 좋은 감옥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가끔씩은, 감금된 인생이, 포승줄을 풀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지만. 구겨진 인생도 좋다. 과거도 미래도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이.
차라리 감옥에 가자. 유배를 가자. 어차피 너희들이 다 가져갈 세상. 내게는 꿈도 희망도 남겨진 게 없으니, 내게 인생은, 시작부터 여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