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구렁이와 꽃달
이병일
조릿대 수풀 속에서 어미의 생을 탁본하는 밤
우리는 붉은 비늘과 가시 뼈를 뒤집어쓰고
어미의 몸속에서 말갛게 젖은 눈동자를 굴리는
해와 달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유연하고 가느다란 물불의 관성으로 빚어졌으니
그날부터 우리는 별똥무늬 어미의 몸에서
징그럽도록 아름다운 태몽에 시달렸고
물비린내 나는 서로의 피에 뒤엉켜 춤을 추곤 했다
달무리 뜨고 지는 밤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어미의 몸은 한뼘씩 땅속으로 꺼져나갔고
급기야 어미의 혼만이 우리를 날름날름 핥다가
친친 휘감아 안았다 그때마다 꽃과 별과 달이
등허리에 어룽거렸다 아마 어미는
두꺼비와 화사를 배 속에 삼키고 와서
온몸의 숨구멍을 잠그고 독을 끓여냈을 거다
우리의 몸속으로 길길이 들어온 독은
검게 빛나는 꽃달 반점들을 그려넣었던 거다
살갗에 달라붙는 공기의 끈적거림, 그때 우리는
우리를 비좁게 가둔 이승의 허물만을 벗어냈지만
진홍빛 죄와 어미의 기억만은 벗어내지 못했다
다만 우리는 그 죄의 무늬를 풍화로 씻어내듯
싸르륵싸르륵 울다가도,
태생의 피가 가려워서 촉촉한 꽃달을 껴안고 잠든다
-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창비, 2016). 16쪽
이병일
1981년 전라북도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으로 등단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박사
시집
『옆구리의 발견』 (창비, 2012)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창비, 2016)
수상
2012년 5.18문학상
2013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부문
2014년 수주문학상
● ‘사람냄새 난다’는 것은 참 정답고 포근한 말이다. 하지만 사람냄새가 싫어서,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가오지도 못하는 산짐승, 들짐승들, 사람 손을 탄 새끼는 도태시켜버리는 들고양이들 이들에게 사람냄새는 어떤 느낌일까? 잉어에게는 망치로 대가리를 깨는 야수일 것이고, 소에게도, 양에게도, 산에 사는 멧돼지에게도 인간은 최고의 야수요, 또 독사가 된다.
뱀의 촉감. 차갑고 잔인하고 비릿하겠지만, 새끼 뱀에게 어미 뱀의 촉감도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뱀에게 사람의 촉감은 어떨까. 과연 정답고 포근한 느낌일지.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산다. 뱀은 악마의 속삭임을 준다. 뱀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주며 유혹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뱀에게 선악과를 주며 유혹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뱀으로 술로 담그는 쪽은 인간이다. 뱀은 인간으로 술을 담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