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가 녹아내리듯 8월의 무더위에 늙으신 부모님 안녕하신지 문안 전화라도...
-이 세상의 어머니들의 작은 소원.
이 세상에는 가족사, 세상사, 인생사에 구구절절 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인생사에서 고난과 굴곡이 없으면 재미없는 인생의 삶이라고 했던가. 어느 가정에도 크고 작은 고난과 가족사연들이 숨어 있다.
어머니가 장애인 꼽추면 어떻고 절름발이면 어떤가. 즉 다시 말을 바꾸어 자식이 꼽추고 절름발이라도 어머니께서는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모와 자식들 간에 외면적 내면적 다른 점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런대로 묵인된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 철이 들면서 조금식 언행이 다르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고 왜(?)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반항을 일삼기도 한다.
또한 가정의 경제 교육적 환경이나 부모 가족에게 자신에게 결석 사유가 보이면 그대로 저항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한참 옛날 이야기도 되지만 초등학교 때의 운동회는 참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는 즐거움이었다.
가을 높은 하늘 아래 만국기가 펄럭이고 오색 풍선이 휘날리는 신나는 운동회, 그중에서도 부모님과 함께 달리는 경기는 운동회 중에 특히 재미있는 종목이었다.
다음의 이야기는 필자가 어린 시절에 친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고 경험한 생각으로 글로 옮겨 기록해본 내용임을 밝혀둡니다.
“자! 다음은 어머니와 함께 손잡고 달리기입니다. 반환점에 놓인 쪽지를 주어 그 쪽지에 적힌 대로 해서 달리면 됩니다. 자! 모두 출발선에 서 주십시오.” 나는 엄마와 함께 출발점에 서서 출발 신호 총성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가늘게 손을 떨고 있었다. 과연 잘 달릴 수 있을지 긴장되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출발 총성이 울리자.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힘껏 달렸다. 구경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엄마와 내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는 그 응원에 힘입어 더 힘껏 달렸고 반환점에서 쪽지를 주워들었다. ‘엄마가 학생 업고 달리기’ 쪽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순간 엄마는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엄마가 나를 업고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엄마 앞에다 나의 등을 내밀었다.
“엄마! 빨리 내 등에 업혀요.”
엄마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내 등에 몸을 업혔다. 나는 그런 엄마를 등에 업고 열심히 달리고 힘껏 달렸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 커졌다. 나의 엄마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꼽추였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업을 수 없었던 것이다. 등뼈가 무덤처럼 툭 튀어나온, 아무튼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곱사등이었다.
그런 엄마의 운동회 외출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 했던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서 늘 집안에만 틀어박혀 삯바느질만 열심히 하고 살았다. 운동회도 나오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우겨서 모시고 나온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서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땀을 닦아드리고 있을 즈음 선생님께서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아주 잘 달렸다. 수고 많았다.”
“선생님 우리 엄마에요.”
“알고 있단다.”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가 내게 말했다.
“너를 한번 업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데 엄마는 너를 업을 수 없으니 .......,”
“괜찮아요. 그 대신 내가 엄마를 업으면 되잖아요.”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를 생각하는 효자였다. 그러나 좀 더 크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괜히 창피했고, 엄마와 함께 어디 가는 것을 극구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 자식에게도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창피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서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떠올린 것은 운동회였고, 나를 한번 업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같은 병을 지닌 사람은 수명이 일반인보다 짧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의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너무 무거웠고 슬펐다.
어머니를 잃고서야 느껴지는 이 후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휘어진 등처럼 솟아 오른 봉분을 어루만지다 그 봉분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엄마가 나를 한번 업어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셨죠? 이렇게 저를 업으셨잖아요. 돌아가셔서 소원을 이루셨네요. 죄송해요 어머니!, 이 아들을 용서하세요.”
사랑하고 존경하옵는 세상의 아들 딸 여러분 온 대지가 녹아내리듯 무더운 8월의 무더위에 늙으신 부모님들께서 몸 건강하게 모두들 안녕하신지 문안 전화라도 한번 해 주시길 제언하고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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