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이 고목나무에 절을 하고 손자를 점지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고향은 늘 그곳에 있다. 비록 초가집이나 스레트집이 현대 빌딩의 건물로 바뀌었지만, 땅은 고향의 그 땅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그곳이 고향이고 추억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높이대로만 세상을 보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사고(思考)하는 이념(理念)과 사상(思想)에 집착하여 타인의 사고나 정신을 판단하고 편견(偏見)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21세기를 맞아 많은 것을 얻었으나, 그보다 더 소중한 것도 잃고 사는 사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근래에 와서는 이런 추억의 고향 관경을 볼 수가 없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 시골 동구 밖 어귀에 오래된 고목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고목나무를 향해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는 쌀 한 종지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고목나무(오래된 나무. 오래될 古(고), 나무 木(목)) 란?
매우 큰 물체(혹은 사람)에 매우 작은 것이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다"고 한다. 혹은 무언가가 애매한 자세로 매달리거나 달라붙어 있을 때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인류 초기부터 신목으로써 신앙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동시에 전래동화에서 본의 아니게 악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늙으신 할머니가 돌아가실 적에 고목나무를 조심하라 했는데 예전에 주인공에게 원한을 졌던 매체(생선 훔쳤다가 맞아죽은 고양이라든지)가 고목 안에 들었거나 밑에 묻혀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동네 할머니들은 고목나무 아래서 우리 며느리 아들 낳게 비나이다.” 그렇게 고목나무에 절을 하고 빌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시대가 바뀌어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소중한 사회로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들이 대를 잇는다고 아들을 소망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할머니는 그 고목나무에 수없이 절을 하면서 손자가 태어나기를 빌었다. 얼마 후 할머니는 고목나무에 절절히 기도한 덕에 귀여운 손자를 보았다. 고목나무는 할머니의 신앙이었고, 의지였으며 믿음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고목나무가 마을을 지키며 온 마을의 가족들을 보살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를 등에 업고,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목나무 아래에 앉아 멀리 논에서 일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는 게 삶의 낙이었다.
할머니는 평생 고목나무를 의지하고 다복하게 사시다가 ‘어이야, 어이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꽃상여를 타시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꽃상여는 고목나무를 지나 양지바른 뒷동산에 묻혀 동네를 굽어보면서 자식과 손자들의 영화를 기원하셨다.
그 누가 그 할머니의 행위를 미신이라고 고목나무에 도끼를 갖다 댈 수 있는 자격이 있단 말인가. 누가 그 고목나무에 절을 하시는 할머니를 정신이상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인생은 각자의 눈높이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모든 종교나 신앙의 행위가 인간의 선(善)과 행복(幸福)을 추구하고 향할 때, 그 어떤 종교이든 원시 신앙이던 고귀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원시 신앙이라 할지라도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동구 밖 그 고목나무도 할머니에게는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신앙이었다. 할머니는 심성이 곱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셨다. 그 할머니는 참 종교인이었고,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참으로 곱디고운 한국의 어머니이셨다.
우리는 지금 진실로 소중한 것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일까? 높은 지식과 한없는 욕망이 우리에게 수많은 편리함을 주었지만 또 무엇인가 푸근한 인정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닐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똑똑한 지식인들이며,
남보다 더 잘 살기위해 몸부림치며 경쟁사회를 살아가면서 그들은 행복한가?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몸부림치는 그대들은 술꾼을 만들었고, 정신이상자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그 고목나무가 베어져 버리고 고목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아스팥트가 깔리고 번쩍번쩍한 고급 세단차가 달리고 있다. 도시개발에 피해를 본 것이 그 고목나무 뿐이겠는가. 그 할머니의 신앙이자 희망마저 모조리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