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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손미 내가 한 컵의 우유였을 때 네가 나를 열차의 창문에 던져버린 수원에서 차가운 볼을 대고 문득 창문의 식욕이 궁금해진 수원에서 열차에 올라 두 번째 칸에 앉아 있었다 흔들리며 쏟아졌던 수원에서 열차를 돌던 정령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목마가 되길 바랐지만 목마 같은 건 너무 흔하지 않은가 여기서 좀 뽑아줘. 피부 아래 흰 피가 소리치는 수원에서 여기는 내 자린데요? 내 자리라고! 창의 입속에서 거대한 아기가 입맛을 다시는 수원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사람이, 자리를 뺏기고 목마처럼 서 있던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는 수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4.1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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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화송승언 오래된 이발소에 걸린 빽빽한 묘비 그림. 그림 보며 양화진에서의 한때를 떠올린다. 자신의 키만 한 아기무덤들을 보며 아이는 묻는다. 엄마, 저 돌들은 왜 저 돌들보다 작아? 너만 한 애들이 천사가 되어서 그래. 죽음을 모를 게 분명한 아이도 천사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아이의 얼굴을 본 엄마는 당황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음…… 그러니까 수진아, 방학하는 거야. 영원한 방학? 방학이라는 말에 아이는 흥분한다. 차가운 물 맞으니 번쩍 정신이 든다. 거울에 비친 까까머리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4.1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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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赤, 迹, 敵, 吊) ― 작약정훈교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읍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Paeon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 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4.0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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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의 시간 1허연내 온몸에 가시가 있어 밤새 침대를찢었다. 어제 나의 밤엔 아무것도 남지못했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했다.가시는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밤마다 돋아나오고 나의 밤은 전쟁이 된다.출구를 찾지 못한 치욕들이 제 몸이라도지킬 양으로 가시가 되고 밤은 길다.가시가 이력이 된 날도 있었으나 온당치않았고 가시가 수사(修辭)가 된 적이 있었으나모든 밤을 다 감당하진 못했다. 가시는빠르게 가시만으로 완전해졌고 가시만으로남았다. 가시가 지배하는 밤. 가시의 밤허연1966년 서울 출생.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집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3.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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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이장욱 나는 어딘지 몸의 빛깔이 변했는데 내가 많이 거무스름하였다.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잘 표백을 시키고 너무 백색이 된 뒤에는 침묵하였다. 당신이 추측을 했는데 저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존재해도 허공을 닮을 뿐입니다. 저런 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나를 의아해하였다. 있다가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 모든 것에 흡사하다고. 그래도 나에게는 많은 것이 떠오르는데 가령 당신의 키와 면적 호주머니 속의 빈손 먼 불행의 접근 죽은 친구 결국 발바닥이 온몸을 지탱하는 것이다. 발끝은 아니지만 발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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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교
2016.03.2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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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와서류근인도 뉴델리의 귀부인들은겨울이 와서 영상 10도가 되면밍크코트를 입고 외출한다길거리에서 헝겊쪼가리 하나로우기와 건기를 다 보낸 사내들은겨울이 와서 영상 10도가 되면웅크린 채 동사하는 일이 잦다겨울은 그런 것이다겨울을 믿는 자에게겨울은 외출이거나 죽음이 된다믿고 싶지 않으나내게도 믿을 수 없는 겨울이 와서헝겊쪼가리 같은 마음 위로칼빛 바람이 파르르,제 자국을 새기고 지나간다류근1966년 경북 문경 출생.1992년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시집으로 『상처적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3.13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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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손을 넣을 때박현수가방을 열면소(沼)처럼 검푸른 심연이 출렁인다당신 손이아무리 깊이 휘저어도닿지 않는 어둠이 있다소용돌이에 휩쓸려가끔씩 물건들이 사라지는 곳어느 순간 손등이다른 허공에 놓인 듯 서늘할 때블랙홀 속에손을 집어넣고우주의 자궁을 더듬고 있는 당신!닿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당신의 슬픔이희미하게 빛날 법도 하지만어느 가방도한 사람의 일생을 다 담을 수는 없다박현수1966년 경북 봉화 출생.1992년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3.0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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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太初)의 아침윤동주봄날 아침도 아니고여름, 가을, 겨울,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ぐ?꽃이 피어났네,햇빛이 푸른데,그 전날 밤에그 전날 밤에모든 것이 마련되었네,사랑은 뱀과 함께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尹東柱(윤동주)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1936년 『가톨릭 소년(少年)』 11월호에 동시 「병아리」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정음사, 1948)가 있다.● 오늘 아침 뉴스는 저 남쪽 바다 麗水(여수)에 붉은 冬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2.28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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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서채상우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가 빠져나간 고양이가 있다 킨텍스로 대화공원 앞 삼차선과 사차선 사이 고양이 하나가 꼼짝 없이 거기 있다 고양이는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 고양이는 고양이를 두고 어디로 훌쩍 떠나갔을까 점점 얇아지고 있는 고양이 점점 얇아지면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고양이 뭐가 그리 즐거울까 고양이는 한쪽 눈이 짜브라진 고양이 마침내 다른 한쪽 눈도 투툭 사라진 고양이 차 한 대가 지나갈 때마다 물큰물큰 내장을 게워내는 고양이 고양이였던 고양이 고양이는 고양이를 기억할까 나는 왜 애써 무엇인가를 기억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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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교
2016.02.2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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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방앞류경무 고모들은 조방앞에서 다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이 정류장은 깊은 소(沼)처럼 고모들을 삼켰습니다 그 조방앞이 이 조방앞이 아니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여기만 오면 나는 자꾸 넘어집니다 고모야 고모야 오버로크 고모야 핏물 새나가지 않게 바람 들지 않게 제발 날 좀 예쁘게 꿰매줘, 나는 배 밖으로 삐죽이 나온 바늘을 억지로 밀어넣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방앞은 조방앞, 고모들 때문에 무릎병이 또 도지려 합니다 나는 조방앞에 앉아서 구름과자를 한입 베어먹습니다 고모들 후르르 흩어집니다* 조방앞 : 부산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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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교
2016.02.1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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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종암 지난 여름 보경사 산문 앞 육백 살 회화나무 한 분 땅바닥에 온전히 넘어지셨다 일평생, 제 몫을 다하고 허공에서 바닥까지 큰절 한 번 올리고 누운 저 몸, 마지막 몸뚱이로 쓴 경전經典 나도 지금 절 올리고 있다이종암1965년 경북 청도 출생.1993년 『포항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물이 살다 간 자리』, 『저, 쉼표들』, 『몸꽃』이 있다.● ‘절’(寺)을 ‘절’(拜)로 옮길 줄 아는 시인의 해학은 참으로 맑다. 서너 줄의 짧은 시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을 마주한다. 수년 전, 김천 직지사 갔다가 길가에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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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교
2016.01.3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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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꽃불박제천상사화 보러 갔다가산 호수 불붙는 머리댕기를 보았어요그 댕기 불꽃, 오래전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불에 옮겨 붙었어요다시 타오르는 그 불을 끄고자병술을 들이부어도꺼지지 않는 그 불길,상사화 들판에 퍼져나가는 그 불길,상사화 꽃잎 속 꽃술로 점점이 박힌마틸다, 그대의 눈빛눈 시리게 어여쁜 상사화 꽃불 보다가억병으로 취해, 눈길 풀어지다가나도 그만상사화 꽃술로 점점 타들어가는 불이 되었어요박제천1945년 서울 출생.1965~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장자시』, 『호랑이 장가가는 날』, 『마틸다』 외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1.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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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박후기여자는 가끔좌판 됫박 위에 솟은피라미드 구조 위로멸치를 집어 올린다집어(集魚), 자꾸집어 올려도결국 꼭대기에오를 수 있는 건한두 마리의굽은 등짝뿐이다나머지는 우르르,생의 저변으로끊임없이 무너져 내린다집어도 집어도 남아도는멸치들, 좌판 위에서멸시를 견디고 있다박후기1968년 경기 평택 출생.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격렬비열도』 등이 있다. 그림책 『그림 약국』, 사진 산문집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등이 있으며,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웃고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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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교
2016.01.1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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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말길상호새벽 두세 시 무렵골목을 지나는 말들 중 간간히그냥 지나가지 못하고창문 쪽으로 고개 돌리는그런 말 있습니다.이 시간의 말들은 대개술 취해 비틀대기 마련인데흔들림 하나 없는 눈끝내 심장까지 물들이고 마는그 말은 아주 흔한 것이어서부르튼 내 입술을 거쳐사라졌던 것이기도 해서언젠가는 지나가며 내뱉은 말,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이런 말도 찾아오겠구나 싶어창문을 닫는 것인데아니나 다를까, 후두둑투명한 눈동자를 깨뜨리며유리에 달라붙는 말, 말, 말오늘도 불면은 계속 됩니다.길상호1973년 충남 논산 출생.2001년 《한국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6.01.10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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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달이 떠 있는 밤강성은 검은 보자기를 풀었다 아홉 개의 달이 풍선처럼 떠올랐다 수많은 음들이 떠올랐다 음과 음 사이의 미세한 침묵이 뒤이어 떠올랐다 검은 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내가 일곱 살 때 잃어버린 꼬리 달린 언어들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이름들이 떠올랐다 심장 없는 인형들이 떠올랐다 눈 내리지 않던 그해 겨울이 떠올랐다 네 귀가 펄럭이던 그 겨울의 방이 떠올랐다 가지를 친 푸른 골목들이 떠올랐다 빛나는 그림자들이 새겨진 기왓장들이 떠올랐다 내가 엎지른 물들이 떠올랐다 물에 빠져죽은 열한번째 어머니가 떠올랐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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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교
2016.01.0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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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김용락서민아파트의 날품 밤 깎는 어머니들시커먼 아궁이 속 같은 콘크리트 출입구가기약 없는 생활처럼 너무 어둡다목에 풀칠하고 자식 위하는 일이라면밤 껍데기뿐만 아니라자기 껍데기마저 사정없이 벗겨 내려는 듯이조금의 틈도 없이 두 손을 놀리는 그 사이로언뜻 파랗게 곧추선 칼 끝이 하늘을 찌른다그 주위에는 갈 곳 없는 아이들 몇이서코딱지를 떼며 어슬렁거리고도시의 찬바람 속에서더욱 가난하게 드러나는 어머니들의 노동그 속에는 시퍼렇게 다져놓고속으로만 앓아온 당신들의 눈먼 반평생이 들어앉아 있다비로소 그 속에 나도 있고 혁명도 있지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5.12.2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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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정한용 저 속에는 침묵이 박혀 있다.묵은 사연들이 화석처럼 잠겨 있다.입을 잃었지만 말을 잊은 건 아니어서그 소리는 저절로 소리를 낸다.붉은 핏줄도, 음모도, 검은 연결 고리도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가만 귀기울이면 노래가 들린다.변병이거나 항명이거나진흙에 머리를 박고 그 틈새로몇 줄의 신호가 울린다.덮으려 할수록 기록은 깊어지고 단단해져끝내 정곡에 닿는다.정한용1958년 충주 출생.1980년 신춘문예에 평론 당선, 1985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5.12.2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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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박준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박준1983년 서울 출생.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문학동네)가 있다.● 민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정약전이 천주교 신도 박해로 흑산도 유배 갔을 때 쓴, 『玆山魚譜(자산어보)』에 민어를 면어(鮸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민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5.12.13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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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滿朔)김성규 은행나무는 몸 뒤척여 남은 잎사귀 쏟아냅니다 노을을 한조각씩 물고 떨어지는 이파리 두 사람 주위로 내려앉습니다 검버섯 핀 노인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아이, 사탕을 떨어뜨립니다 개미들이 의자 주위에서 머뭇거립니다 아이의 그림자에 발이 걸린 듯 노인이 넘어집니다 지팡이를 손목에 묶어주던 햇살이 실뱀처럼 달아납니다 개미들이 사탕을 덮고 있습니다 노인의 손을 잡아당기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소리를 타고 날아오른 참새 한 마리, 발갛게 일어선 저녁노을을 뜯어냅니다 부리에 묻은 피가 하늘로 흘러나옵니다 얼마만큼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5.12.0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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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병들장승리예고 없이 달이 진다이 밤 또, 모두 죽을 때까지서로를 죽여야 하는 시합이 시작된다눈 앞으로 칼에 관통당한다섯 명의 남녀가 동상처럼 서 있다말 대신 칼을 타고 정렬한 호위병들나를 지켜 주는내 죽음을 지켜 주는일층, 이층, 삼층 관중들이 자리를 채운다하늘이 취소된다시합이 끝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장승리1975년 서울 출생.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습관성 겨울』, 『무표정』이 있다.● 마침 오늘, 달을 생각했다. 손톱보다는 작고 내 꿈보다는 큰, 초승달을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박영민의 숨은 시 읽기
정훈교
2015.11.29 2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