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서영처
복도가 긴 격리병동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분열증 환자들이 모여
오래된 병원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얼룩진 세계를 전복시킬 모의를 한다
환자들은 들떠 난상토론을 벌인다
병동은 달아오른다
모든 미래를 백지화하라!
환자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친다
백 색 표 어, 백 색 소 음, 백 색 정 의, 정 백 백
색, 공 포 공 백, 색 혁 혁 명, 백 색 경 보, 백 명
색 설, 설 원 설 원, 백 색 공 화, 국 백 백 백, 색
밤새 누가 도시를 점령한다
백색 문체의 담화문이 걸리고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앰뷸런스가
거칠게 저항하는 자들을 싣고 온다
파쇄기 속에서 부서져 내리는 서류 뭉치들
병동은 사라진다
백색 알약을 먹고 백기를 흔들며 무연고 환자들 쏟아진다
세상은 거대한 봉분
묻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 묻힌다
* 『말뚝에 묶인 피아노』 문학과 지성사. 46쪽.
서영처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며 영남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음
2003년 계간 『문학/판』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피아노악어』 (열림원, 2006), 『말뚝에 묶인 피아노』 (문학과 지성사, 2015)가 있다.
● 백색은 폐색(閉色)이다. 폐색(閉塞)은 공포를 부른다. 공포는 광기를 부른다. 의사와, 환자와, 건물이 모두 하얗게 뒤덮인 병원은, 분열과 광기의 공간이다. 분열과 광기는, 온 세상을 백색으로 뒤덮을 모의를 한다. 마침내, 광기가 온 세상에 몰아친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온 세상에 쏟아진다.
백 색 표 어, 백 색 소 음, 백 색 정 의, 이 부분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일정한 속도로 균일한 강도로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보기를 권한다. 폐로부터 폐색의 기운이 올라와 온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백색 세상이 턱밑에 차오를 것이다.
백색의 서류뭉치로 만들어진 세상이 붕괴되어 내리는 가운데 광기의 깃발로 온 세상을 뒤덮는, 백색의 세상이 열린다. 백색 테러. 그것은 온 세상의 하나의 색으로 물들이는, 우익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박영민 :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
현일고등학교 국어교사. 대구경북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