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36>
내 마음의 뿌리
윤석정
오후에 듣는 풍경 소리, 누가 매달아 놓고 간 마음인가
그 소리는 돌담 아래서 자란 화살나무 가지에 내려 앉아 빗살 무늬 잎을 펼쳐놓고, 그 잎은 돌담 너머 산을 가리키는데
저기 저 구름은 젖이 커다란 계집, 진종일 우는 산새와 나무를 꽉 껴안는 계집, 마른 바위에게도 젖 물리는 저기 저 계집이 입술들에게서 한쪽 젖을 빼내면 젖은 새소리, 나뭇잎과 돌멩이가 칭얼거리는데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젖내가 기어 와 돌담을 넘더니 마당에 퍼질러 앉는데
그 계집이 유두를 오롯이 세우니 젖내를 갉아 먹는 비 내리고, 비릿한 빗줄기를 가만히 서서 맞는 화살나무, 나무의 빗살에 뚝뚝 끊어지는 비의 줄기, 토막 난 줄기는 구름씨알인 듯 돌담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데
오후가 다 지나도록 마루에 앉아 나는 젖먹이처럼 맥없이 입술을 내밀고 옹알거리는데
허공에 매달린 마음, 그 공명이 내 마음의 뿌리를 여기저기로 뻗어나게 하네
윤석정
1977년 전북 장수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06년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시집으로 『오페라 미용실』이 있음.
●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은 몇 해 전 봄날, 직지사 처마 끝에서 바람과 한 몸으로 뒤섞인 풍경 소리였다. ‘오후에 듣는 풍경 소리’는 한달음에 ‘돌담 너머 산’으로 번졌다. 누구든 가만 ‘풍경 소리’를 듣노라면 저절로 ‘누가 매달아 놓고 간 마음’을 떠올릴 테고, 또 야사(野史)에 나올 법한 어떤 전설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쯤 되면 풍경(風磬)이 풍경(風景)을 낳고, 풍경(風景)이 풍경(風磬)을 낳는다. 곧 山寺에 들이칠 먹구름마저 상서롭고 아주 신비롭다. 거대한 구름은 한없이 품는 어미(母) 같아서, ‘산새와 나무’도 껴안아주고 ‘마른 바위’도 껴안아준다. 이 순간만큼은 ‘젖이 커다란 계집’이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꼭 구름일 필요는 없다. 다만 ‘내 마음’이 어미라고 명명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미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먹구름이 한꺼번에 몰린 ‘유두를 오롯이 세우니’ 온 천지에 비가 내린다. 뾰족한 화살나무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비는 그 모든 것을 품으며 ‘구름씨알인 듯 돌담 아래’까지 번진다. ‘오후가 다 지나도록’ 비릿한 풍경(風景)이 후-욱 밀려오고, ‘나는’ 그만 모든 것을 잊고 ‘맥없이’ 어미에게 옹알이를 해보는 것이다. 태어나서 막 옹알이하던 어린 때로 잠시 옮겨 가보는 것이다.
‘허공에 매달린 마음’은 어쩌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렀을 그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시 전반에 깔린 에로티시즘 분위기와 山寺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누가 매달아 놓고 간 마음’에서 생(生)과 자궁 이전의 근원을 꿰뚫는 시인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동시에 평생의 화두로 삼아도 좋겠다.(시인 정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