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32>
설득
권기덕
당신 머릿속에 둥근 방 A가 있습니다 A에는 꽃병과 꽃병이 담고 있는 a의 생각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타브로이드 신문냄새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고 테이블에 삽입된 의자는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를 떠올립니다 째즈 음악이 벽면에 부딪칠 때마다 장미꽃덩굴 벽지에는 은밀한 욕망이 자라고 붉은색은 점점 짙어집니다 A는 고요하고 a는 충동으로 가득합니다 이 때 적막을 깨고 B가 노크도 없이 불쑥 당신의 방에 들어옵니다 꽃을 꺾습니다 꽃은 a입니다 몽유는 B가 a속으로 들어가는 현상입니다 깜깜한 땅속, 뿌리가 꿈틀거립니다 물관을 타고 올라갑니다 (a)가 숨 쉴 때 기공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옵니다 몸에 날개가 펄럭입니다 잠자리가 되었습니다 (B)는 방이 없습니다 물속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알을 숨겨둡니다 이제 (a)'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중에 누워 b가 되어 봅니다 깨어보니 테이블위의 꽃병이 보입니다 A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권기덕
1975년 경북 예천 출생.
2009년 계간 『서정시학』 등단.
● 설득(說得),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시가 설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상대편은 과연 누구일까, 의문을 가져보는 데서 이 시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 대문자 A와 소문자 a는 상응이며, 동시에 상충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당신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것이다. ‘둥근 방’ 안에 갇혀, 여기 서로를 탐하는 알파벳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가 ‘널브러져 있고’, ‘부딪’히고 동시에 ‘고요하고’, ‘충동’적이다. ‘둥근 방’ 안에는 무질서와 혼돈(Chaos)의 세계가 복잡 미묘하게 얽혀있다. 때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상대편의 ‘꽃을 꺾’기도 한다. 당신이 당신을 올라타고 당신이 나를 올라타고, 내가 당신을 올라타고 내가 나를 올라타기도 하는 ‘깜깜한 땅속’ 같은 세계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충동’이고 ‘고요’이고, ‘날개’이고 ‘물속’이기도 한, ‘둥근 방’이다. 그 방 안에는 실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한 현실 속에 A, a, (a), (a)', (B), b가 있다. 이 알파벳 괄호는 상대에게 있고 또한 상대에게 없어도 무방하리라. 종국에는 모두가 사라지고 말 A가 될 테니... 역설적으로 나는 말한다. 나는 오늘도 ‘둥근 방’에서 상대편이 아닌 이쪽 편인 당신을 기다리고 응원한다. 나는 설득이 아니라 포용을 그리워한다.(시인 정훈교)
* 【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26회 연재부터 35회까지는 등단과 관계없이, 대구경북지역 젊은 작가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