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29>
네게 거짓말을 해봐?!
여정
피노키오야, 피노키오야, 물고기 뱃속이 너무 어둡지 않니? 차라리 거짓말을 해버려. 어차피 뿌리 없는 날들. 네 코라도 키우렴. 거짓말은 네 코의 유일한 물과 양분. 어서어서 자라나 물고기의 살을 뚫고 밖으로 나오렴.
피노키오야, 바다가 무섭다고? 수많은 해골이 가라앉아 있는 바다가 무섭다고? 어차피 넌 뿌리 없는 나무. 가벼운 몸짓으로 파도를 타렴. 네 코엔 아직 생장점이 살아있어 빛을 향해 달려가고. 어서어서 거짓말을 하렴. 어서어서 가라앉지 않게.
사람들이여, 피노키오가 살아 돌아왔어요. 어서 톱질을 시작해요. 긴 코를 잘라 집을 짓고 긴 코를 잘라 가구도 만들어요. 톱질에 맞춰 거짓말을 시켜요. 톱질에 맞춰 더 많은 거짓말을.
할아버지, 할아버지, 또 물고기 뱃속이에요. 이번 물고기 뱃속은 너무 넓어요. 끝이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 제 콧구멍 속에다 집을 짓고 제 콧구멍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겨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또 집을 짓고 도망가려 하지 않아요.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닿지 않는 날들. 물고기 뱃속은 눈부시도록 환하기만 한데 자꾸 코가 간질거려요. 자꾸 재채기가 나려고 해요.
여정
1970년 대구 출생.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벌레 11호』(문예중앙, 2011)가 있음.
●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 가벼운 느낌으로 시작하는 시이다. 그러나 그로테스크(grotesque)하고 불편한 분위기는 지울 수 없다. 피노키오의 코에다 대고 ‘물고기의 살을 뚫고 밖으로 나오렴’이라고 다정스럽게 속삭인다. 하지만 이 또한 잔인성의 극대화를 위한 시적 장치에 불과하다. 부드러움으로 잘 포장된 위선! 시인은 본질이 본질다울 때, 그 본질은 본질로서 의미를 얻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뿌리 없는 날들’, ‘뿌리 없는 나무’ 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본질조차 본질이 아니라는 비극의 상관물인 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본질은 또한 ‘생장점’처럼 매일 ‘빛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비극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당신과 나를 감싸며 성장하고 있다.
‘긴 코를 잘라 집을 짓고 긴 코를 잘라 가구도 만들어요. 톱질에 맞춰 거짓말을 시켜요’와 같이, 피노키오의 ‘코’는 이미 ‘코’가 아니다. ‘코’의 순결성(본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코’는 이제 허구와 위선의 상징물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매순간 본질이 주체를 넘어 객체화된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생장점’을 갖고 매일 쳇바퀴 돌 듯 펼쳐지는 허구와 위선의 전투신(현실)에서 당신과 나는 ‘피노키오’처럼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안타깝게도 그 부조리를 겪으며 우리는 성장하고 더욱 부조리해진다. 현실이 ‘물고기 뱃속’인줄도 모르고 ‘톱질’만 열심히 하는 형국이다. 이제 무질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허구와 위선으로 둘러싼 비극적 전투신은 그만 찍자. 당신과 나! 크게 ‘재채기’ 한 번 하고, 온갖 위선은 훌훌 털어버리자! 이제 그만 본질로 돌아가자. (시인 정훈교)
* 【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26회 연재부터 35회까지는 등단과 관계없이, 대구경북지역 젊은 작가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