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27>
법전의 역습
추종욱
켜놓은 전구로도 어두운
창 없는 쪽방이었다
후덥지근한 열대야의 오후
밀폐된 방이 흘리는 땀으로
후줄근해져 누워 있는 사내
법전처럼 너덜거린다
그는 해마다 考試에 떨어진 뒤,
가장 중요한 건강을 잃었고
조금씩 말라가는 몸은
부식된 방바닥의 한 부분처럼
곰팡이가 번졌다
그가 만진 법전들은
오래전에 꺼진 등불이다
법전 속 빨간 밑줄을 모아 새끼를 꼰다
며칠 후 그의 목에는
몇 권 분량의 긴 이야기들이 감겨있었다
일주일 동안 환풍기에 목이 매달려도
두 눈 부릅뜬 채
일몰하는 법전 속을 노려본다
법전, 그 어디에도
사내의 행복추구권은 없었다
추종욱
1970년 대구 출생.
2007년 계간 『서시』로 등단했으며, <난시> 동인, 시산맥 회원이다.
● 제목이 참으로 유쾌하다. 그러나 무서운 반어(反語)다. 우리는 온갖 악행이 낭자한 세상에 들어와 있다. 이런 비극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법전’으로 열심히 하루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신과 나는 미처 ‘법전’을 펴볼 사이도 없이, 날마다 악행과 ‘땀으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 없는 쪽방’에서도, ‘후덥지근한 열대야’에서도 그 누군가는 자신의 ‘법전’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법전’이 전부인줄 알고 평생을 달려왔는데, 종국엔 ‘考試’도 떨어지고 ‘건강’도 나빠진다면? 이는 행복을 추구하다 오히려 행복을 탈취 당하는 꼴이다.
오늘처럼 뜨거운 날에도 자신의 ‘법전’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성실한 이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 ‘법전’이 “곧 생명이요, 진리”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시인은 지금 소멸해가는 한 生을 냉정하게 그리고 있다. 오히려 너무 덤덤하여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애초에 시인의 시선은 곤궁한 삶과 ‘오래전에 꺼진 등불’에 가 닿아 있다. 우리 삶의 주인공은 ‘법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온갖 멸시와 냉대 가득한 ‘법전’이 아니라, 시인의 시선처럼 따뜻한 ‘법전’을 찾아 읽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몰하는 법전 속’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아니길 바란다.(시인 정훈교)
* 【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26회 연재부터 35회까지는 등단과 관계없이, 대구경북지역 젊은 작가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번 회차는 27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