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검은 돌에 새겨진 子, 혹은 女
이종형
살아 있었다면
큰형님뻘이었을
큰누님뻘이었을
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
4월 바람에 떨어져 누운
꽃잎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지고
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
거친오름의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자리에
복수초 노란 빛깔보다 선연한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섬에 피는 꽃과 바람들,
곶자왈 숨골로 스미는 비와 태풍들
저 이름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종형
제주 출생.
2004년 『제주작가』로 등단했으며, 강정평화책마을 대표 및 ‘제주문학의 집’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 이제 휴가철이다. 산과 계곡과 바다로 당신을 옮기는 철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휴양지는 어디일까?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바람이 손짓하는 그곳, 이름만 들어도 가슴 뭉클한 곳. 바로 천혜의 섬 제주도다. 우리가 아는 푸른 섬, 제주도 그 이면은 어떤가. 달의 뒷면을 보기까지 35억 년이 걸렸다고 한다. 올해 초에는 미 항공우주국 나사가 생생한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 중 제주의 뒷면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일제강점이 끝나고 한국전쟁 그 사이 수많은 ‘子, 혹은 女’가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갔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이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한 많은 이들이 항거에 나섰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런 양민을 폭도나 간첩으로 덮어씌워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이며, 또한 ‘4월 바람에 떨어져 누운 꽃잎의 붉은 눈동자’였다. 시인은 ‘꽃과 바람’, ‘오름’이 가득한 제주에서 한 편의 시로 이들을 위무(慰撫)하고 있는 것이다. ‘꽃’처럼 ‘바람’처럼 살다간 보통의 이들에게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역사는 아직도 반성과 궤변 그 중간쯤에 있다. 반성 없는 과거가 어찌 미래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였다. 당신과 내가 지은 죄가 오늘도 그 어디에선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정한 반성은 진정한 사과이며, 또한 지은 죄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 정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