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교의 숨은 시 읽기】
間 44
―쓰다 만 유서
구광렬
나와 세상 사이엔 한 장의 유리가 있다
투명한, 얇지만 강한
그것은 마치 쇼윈도 같다
어제도 오늘도
쇼가 펼쳐졌고, 펼쳐지지만
어느 편이 관람객인지 모른다
세상은 나를 마네킹으로 보고
난 세상을 진열장 속 유물로 보니
유리를 걷어내면
유물 앞에 선 마네킹이 된다
구광렬
1956년 대구 출생.
1986년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 El Punto』로 등단했으며, 한국문단에서는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울산대학교 중남미문학 전공(시)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어 시집 『불맛』 외 다수, 스페인어 시집 『하늘보다 높은 땅 La tierra mas alta que el cielo』 외 다수가 있다.
● ‘間’(사이 간)의 제목을 단 연작시다. 그의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 맨 마지막 장에 수록되어 있다. 이 연작시의 시작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까지는 이 시가 구광렬 ‘간(間)’ 연작시의 마지막인 셈이다. ‘간(間)’이라 함은 사이와 사이의 공간이며 동시에 경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타자와 나 또는 대상과 대상과의 ‘間’으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다. ‘쓰다 만 유서’라는 부재도 그렇고, ‘나와 세상 사이엔 한 장의 유리가 있다’라는 표현도 그렇고 역시 간극에 대한 화두이다. 우리는 저 ‘유리’를 두고 이승과 저승의 시간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리’가 깨지면 타임머신처럼 저승으로 순간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유리’ 너머는 각 공간마다 이승이기도 저승이기도 하다. 즉 보는 관점에 따라 이쪽이 ‘관람객’이 되기도 하고, 저쪽이 ‘관람객’이 되기도 한다. 또 이쪽에선 볼 땐 ‘세상’이 ‘진열장’이기도 하고, ‘마네킹’이기도 하다. ‘유리’라는 경계를 두고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주인공이라 할 수 없다. 당신과 내가 ‘유리’ 밖에 있기도 하고, 동시에 ‘유리’ 안에 있기도 한 것이다. 이는 다름의 인정이기도 하고, 우리가 아등바등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신과 또 다른 당신에게 그렇게 적대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한 끗 차이 아닌가.(시인 정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