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을 본관으로 사용하는 우봉(牛峰) 이씨(李氏)이다.
조선조 고종 임금 즉위시 한일합방 주역으로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로 잘 알려진 이완용을 일반 국민들은 전주리씨로 알려져 있으나 전주리씨 족장 종현 종친 여러분 이완용은 우리 전주리씨가 아닌 황해도가 본관인 우봉이씨란 것을 알려드립니다.
< 항설에는 이완용은 조선조 00대군의 후궁의 아들이다. 또 00군의 아들이라는 말들이 유포되어 있으나 이는 전주리씨 성씨와는 전혀 다른 사실무근으로 허무맹랑한 낭설이다. 사기꾼들이자 모사꾼들이 전주리씨를 괜스레 음훼 폄훼하기 위해 지어낸 유언비어성 시중 잡배들의 발언이다.
앞으로 그 어떠한 크고 작은 모임에서 한국인의 성씨를 논 할시에는 절대로 이완용은 전주리씨와는 전혀 다른 성씨란 것을 우리 전주 종현 족장님들은 이완용 관련 아래의 내용들을 잘 숙지해 읽히아시고 절대로 귀죽지 마시고 논리 정연하게 반박의 이야기로 상대를 억압하고 장악해 젊잖하게 우봉이씨에 대한 유례를 바탕으로 한수들 가르쳐주시길 제언 촉구하고 기대합니다 >
우봉이씨 유례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우봉이씨 시조 :이공정(李公靖)
집성촌 :경기도 양평군 일원.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용리.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개심리.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지정리.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혁전리.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작천리.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일원. 황해도 금천군 좌면 고산리.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과,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산격동, 검산동, 동변동, 서변동 일원.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녹시리.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로. 인구 :23,902명(2015년)
웹사이트 :우봉이씨 대종회 사이트. 우봉이씨 모임 카페. 우봉이씨 모임 밴드가 있다.
1. 개요 2. 집성촌 3. 항렬표 4. 분파 5. 역사 6. 해당 인물
1. 개요[편집]
황해도 금천군의 옛 이름인 우봉(牛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시중(侍中)을 지낸 이공정(李公靖)[1][2]이다. 한편으로는 항간에 경주 이씨의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후예라는 설이 전해진다.[3]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속하는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이 우봉 이씨 소속이다. 여흥 민씨와 함께 지금도 친일행위로 인해 욕을 먹는 가문이다.
2. 집성촌[편집]
주로 충청도와 경상도에 분포돼 있다. 충북지역은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룡리, 옥천군 이원면 지정리와 개심리 등이다. 경상도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경북 문경시 가은읍 작천리, 문경시 마성면 등지에 집성촌이 있다. 그밖에 경기도 양평군 일원과 황해도 금천군 좌면 고산리에도 많이 살고 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우봉이씨는 1985년에는 총 4,278가구 1만7,513명, 2000년에는 총 6,388가구 2만52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5년 만에 6000여 가구, 3000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5,566명, 부산 443명, 대구 959명, 인천 802명, 경기 3,246명, 강원 955명, 충북 1,537명, 충남 2,093명, 전북 140명, 전남 92명, 경북 1,430명, 경남 244명, 제주 6명이다. 서울, 경기, 충남, 충북 지역에 많이 살았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에는 서울 5,610명, 부산 477명, 대구 1,112명, 인천 1,304명, 광주 40명, 대전 1,110명, 울산 188명, 경기 5,305명, 강원 903명, 충북 1,532명, 충남 1,252명, 전북 125명, 전남 107명, 경북 1,220명, 경남 210명, 제주 30명이다. 서울, 경기, 충북 지역 등에 많이 살고 있다.
3. 항렬표[편집]
우봉이문(牛峯李門)은 오행(五行)에 맞춘 글자를 제(第) 22세(世)까지 썼으며, 제23세(世)부터는 지지(地支)로 하였다. 그리고 1927년 전국 각(各) 파종(派宗)의 수단(收單)을 모아서 『 우봉이씨세보(牛峯李氏世譜) 초판(初版)을 편집할 당시 종약임원회(宗約任員會)의 숙의(熟議)를 거쳐 제44세(世) 까지 항렬자(行列字)는 물론, 그 위치까지도 제정하였다.
곧 제23세(世)부터 제32세(世)까지는 천간(天干)[갑(甲), 을(乙), 병(丙), 정(丁),……임(壬), 계(癸)]자(字)의 자획(字畫)이 든 글자를 쓰되 다음과 같은 서열자(序列字)로 결정하였다.
다만, 제26세(世)의 항렬자(行列字) 녕(寧)자는 파종(派宗)에 따라서 선대(先代)의 휘(諱)자(字)가 있는 경우에는 기휘[忌諱 : 그 휘(諱)를 피함]해서 형(衡) 자로 쓰고, 또한 제27세의 항렬자의 자리, 곧 무○(茂○)도 파종(派宗)에 따라서는 ○무(○茂)로 쓰기로 하였다.
세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항렬자 ○용 (○用). ○구 (○九) .병○ (丙○). ○녕(○寧). ○형(○衡). 무○ (茂○). ○범 (○範. 강○ (康○). ○재 (○宰). 성○ (聖○). ○규 (○揆). 천간.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세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항렬자 학○ (學○). ○건 (○建). 인○ (寅○). ○경 (○卿). 진○ (震○). ○선 (○選). 년○ (年○). ○업 (○業). ○보 (○輔). ○준 (○遵)
지지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세 43 44
항렬자 성○ (成○). ○현 (○玄)
지지
술(戌). 해(亥)
4. 분파[편집]
부사공파(副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원외랑공파(員外郞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대사간공파(大司諫公派), 사직공파, 지평공파, 종성군파(鐘城君派), 의열공파(義烈公派)
5. 역사[편집]
우봉이씨 시조 문경공[文景公 :공정(公靖)]은 서기 1137년[고려조 인종15년, 정사 (丁巳)]에 태어나서 1212년 [강종(康宗)]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우봉이씨(李氏) 원조(元祖)는 통일 신라 이전의 우장군(右將軍) 두창(昌) |어른으로, 지략(智略)이 남보다 뛰어나서 옥저(沃祖)로 하여금 잘 달리는 말(양마) |200필을 헌납하게 한 공으로 신라 공신이 되었다고 명위보(明衛譜)에는 전하여지고 있으나 사기(史記)에는 기록이 없고 또한 그 뒤의 후손에 대한 기록도 없어져서, 서기 1137년 고려 인종(仁宗) 때 우봉현(牛峯縣) 도이촌(桃李村)에서 태어나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벽상삼한삼중공신(壁上三韓三重功臣)에, 지금의 국무총리격(格)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지신 휘(諱) 공정(公)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그때부터 본관(本貫)을 우봉(牛)으로 하였다. 시조공은 희종(熙宗)때에 병부상서로 좌천되었다가 돌아가셨는데, 뒤에 삼주백(三州伯)의 백작(伯爵)을 증직(贈職) 받았고, 문경(文景)의 시호(詩號)를 받은 분으로 고려사 열전에서 의렬[義烈 :휘(諱) 자성(子)]공의 父로 처음 기록을 찾는다.
시조 문경공(公靖·잠성부원 군)과 맏아들 [자의(子儀)·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차남 의령공[자성(子) 문하시랑(門下侍郞)평장사(平章事)]이 고려 때 명성이 높았다. 조선조 때는 양직공(6세 養直·성균관 직강) 종성군(7세 · 雲路·서도순변사) 두봉공(8세 · 吉培· 황해도관찰사) 청백리공(9세 · 淳 · 병조판서) 부사공(根專·부사) 참판공(根 · 호조참판) 감찰공(·증 좌찬성) 대사간공 (질 · 증예조판서) 사직공(延· 대사간) 지평공 (완·증 호조참판)등에 아홉 문중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뿌리가 굳어져 10세에서는 승녕(承寧 대사성)·자강공(承健• 홍문관 대제학 ·堂)과 보진암공(12세 之信 황해도관찰사) 만회당(14세 . 有 호조참의) 일휴정공 (15세 • 숙 충헌 우의정) 문목공(翔 · 대사헌) 농재공(朝 · 이조판서) 귀락당공(16세 · 晩成 형조 이조 병조판서) 도암공(17세 · 재 문정공 양관 대제학 성리학자) 화천공(18세 · 문경 호조참 판) 분간공(20세 · 光文 좌찬성) 문정공(光正. 이조판서) 문정공(21세 - 우예조판서) 충백공(22세 · 鎬俊 이조판서) 등 가문의 전통이 이어져 조선조 때 소족이면서 4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의 이승건(李承健)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이지신(李之信)은 판결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상(李翔)은 유일(遺逸)로 벼슬에 올라 1661년 자의(語議)를 거쳐 정언(正言), 지평(持平), 진선(進善), 집의(執義) 등을 역임했고, 숙종 때 형조와 호조의 참의, 대사헌을 지냈다.
이숙은 숙종때에 우의정을 지냈고, 이익(李朝)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이만성 (李晩成)은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재(李韓)는 1702년 알성문과(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지, 부제학, 한성부 우윤 등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는데, 조선후기 성리학계의 대가로서 당시 낙론(洛論)의 대표적 학자로 일컬어졌다. 이령은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가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가족과 함께 길상산(吉祥山)으로 피난 도중 적을 만나 아버지와 함께 대 항했으나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업고 도망하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부인과 형수도 자결했다. 이에 충절로서 정문(門)이 세워지고,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한편, 이유겸(李有謙)도 병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뒤 이조참의에 이르렀고, 이채(李采)는 174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호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이광문(李光文)은 180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라도관찰사, 형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다.
2世 의렬(義烈)公 휘(諱) 자성(子)
고려 국난극복의 주역으로 우봉이씨 시조(公)공의 아들이다. 고려 열전(제16권)과 동국병람 기록에 의하면 휘(諱) 자성(子)은 성품이 강렬하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 능숙(能)하였다. 1231년 몽고의 살례타이 [철례탑(禮塔)]가 쳐들어 왔을때 출전하여 동선역(洞仙) (지금의 황주)에서 적의 선봉대를 격퇴하는 공을 세우고(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함), 이듬해 조정이 강도(江都, 강화도)로 천도하자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에서 이통(李通) 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장군(上將軍)으로 후군(後軍) 진주(陳主)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에서 일어난 우본(本 :승려출신)이 다시 노예들을 모아 반란 (反亂)을 일으키자 그를 사살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또한 1233년 4월 중군(中軍) 병 마사(兵馬使)가 되어 용문창(龍門 : 지금의 양평)의 난을 토평하고, 6월에는 동경(東 京 : 지금의 경주)에서 최산(崔山), 이유(李儒) 등 반란의 무리들을 무찔러 개선하였다. 큰 공을 세우고 개선(凱旋)하자 많은 군졸(軍卒)들이 문앞에 모여 들자 자성(子)은 시기를 꾀하는 자들의 모함이 두려워서 병을 핑계로 하여 군졸들의 출입을 끊자 오 히려 지혜로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그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고 충혜왕(忠惠王)의 교서(敎書)를 접하면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제수(除授)받았다. 1251년 유명을 달리하여 나라에서는 그 공훈을 높이 기려 의렬(義烈)의 시호를 수여했다.
도암공(陶菴公) 휘(諱) 재(縡) 이 재(李 縡)
숙종 28년에 문관에 급제, 형조참 판·한성부우윤 - 영남군전사 · 예조참판 · 대제학을 지냈다. 탕평책에 열중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50권, 어류초절(語類抄節), 근 사심원(近思源), 오선생휘언(五先生言),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이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29명이 있다. 문과 43명, 무과 8명, 사마시 78명이다.
6. 해당 인물[편집]
이건무 -이병도의 손자. 전 문화재청장, 국립중앙박물관장.
이자성 -고려시대의 장군.
이재 -조선의 유학자.
이완용 -족보에서 파였으므로, 자기 집안에서도 제명당한 셈이다.
이윤용 -이완용과는 의붓형제. 매국노.
이동녕 -前 국회의원, 봉명(문경탄광)그룹 창업주
이승무
이범수 -배우
이병도 -이 사람은 이완용의 친척이라는 설이 돌았으나 실제로는 이완용과는 거의 본관만 같은 수준이고 30~40촌 정도의 관계. 그냥 남남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우봉 이씨 가문의 수치라 생각하여 이완용의 관을 '사비로 사서 불태워 버린 사람'이라는 말은 있다.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된 것은 조선사 편수회 촉탁 활동 기록 때문.
이병린
이병훈 -사극 전문 프로듀서
이어령 -문학평론가이자 전 장관. 이 사람도 이완용과는 20~50촌 관계. 이병도의 7촌 조카이기도 하다.
이장무 -이병도의 손자. 전 서울대 총장.
이찬구 -정치인
이창하 -건축가
이세무 -前 봉명그룹 회장
이병무 -아세아그룹 회장
이만령 -前 광일식품 대표이사
이병덕 -前 대한도시가스 부사장
이영범 -법무법인 화인 고문변호사
이원구 -前 배화학원 이사장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