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최초로 천주교의 십자가를 들여온 사람은 신부도 아니요, 천주교 신자도 아닌 임진난(壬辰亂) 구국의 승장(僧將)인 사명대사였다는 것을 한국 천주교는 알고 있을까?
해마다 사명대사 추모제를 지내는 소수의 승려들과 선남선녀들은 양력 6월 10일 오전 10시부터,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에 모셔져 있는 사명대사 동상 앞에서 추모제를 모신다. 사명대사 추모제는 호국정신을 기리며 계승하자는 목적이다.
사명대사는 1544년 지금의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부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관(本貫)은 풍천(豊川), 속성(俗姓)은 임(任)씨, 속명(俗名)은 응규(應圭)이다. 법명(法名)은 유정(惟政), 자(字)는 이환(離幻), 호(號)는 사명(四溟) 송운(松雲), 탑호(塔號)는 종봉(鐘峰), 시호(諡號)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사명대사는 어린 시절 유학을 배웠다. 7세에 사략(史略)을 배우고, 12세 맹자(孟子)를 배웠다. 하지만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고 난 후 1556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출가위승(出家爲僧)의 첫길을 걸었으니 당시 13세 때였다. 1561년 문정왕후의 배려로 서울 봉은사에서 시작된 불교의 선과(禪科: 지금의 국가시험)에 장원급제 했다. 당시 나이는 18세였다.
임진란을 일으킨 일본의 통치자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통치자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철병(撤兵)하였다.
그러나 피해국인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다시는 침략해오지 않는 강화조약을 맺기위해 사신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아무도 사신역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에 가면 죽을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 왕과 조정대신들은 숙의 끝에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첫째, 일본국은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승려인 사명대사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 둘째, 죽임을 당해도 배불숭유(排佛崇儒)의 나라에서 중하나 죽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사명대사는 왕과 조정대신의 속내를 환히 알면서도 오직 조선의 호국을 위해 일본과 불가침의 강화조약을 맺는다는 단심(丹心)에서 일본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명대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의 고위관리는 물론, 고승들과 문인들과 일반 시민들이 대거 환영인파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명대사를 향해 “설보화상(說寶和尙”을 연호했다. 설보화상이라는 뜻은 보배를 말하는 스님)이라는 뜻이다. 사명대사가 무슨 보배를 말하여 일본 전국에 화제가 되었나?
임진란 때 일본군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지휘하는 군(軍)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지휘하는 군(軍)의 양군이 선봉부대로 침략해왔다.
어느날 사명대사가 조정의 내밀(內密)한 명을 받고 울산에 주둔한 가등청정을 만났다. 가등청정은 사명대사의 명성을 듣고 있던 차에 사명대사를 만나게 되어 우선 시험해보고 싶었다.
가등청정은 사명대사가 오는 길 양쪽에 일본군을 도열하게 하고, 모두 창칼을 뽑아 들게 한 후 사명대사를 마치 죽일듯이 무섭게 노려보게 한 후 그 중간으로 사명대사를 걸어오게 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뚜벅 뚜벅 걸어왔다. 부하로부터 사명대사가 전혀 겁먹지 않는다는 보고를 접한 청정은 내심 감탄하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며 경탄했다고 한다.
가등청정은 애써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거친 음성으로 사명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요?”
사명대사는 곧바로 답했다. “장군의 목이 조선의 보배지요” 가등청정은 화를 내며, “내목이 왜 조선의 보배라는 말이오?”
사명대사는 큰소리로 답했다. “장군의 목에 조정에서 큰 상금이 걸려 온 조선 백성이 장군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 어찌 장군의 목이 조선의 보배가 아니겠소?”
일순 가등청정은 화가 나 칼을 잡았으나, 금방 미소를 보이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면서, “내 목이 조선의 보배인줄 모르고, 대사에게 조선의 보배를 물었구려. 내가 어리석었소.” 가등청정은 군막(軍幕)이 떠나가라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사명대사도 큰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의 내용을 들은 도열한 일본군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후 사명대사와 가등청정과의 오간 조선의 보배에 대한 이야기, 즉 설보(說寶)의 이야기는 조선에 출병한 전 일본군의 웃음을 자아냈고, 그 입소문은 일본에 히데요시도 전해듣고 배를 잡고 웃으면서 “청정이 졌다! 그 기백이 충천한 설보화상이 보고싶구나.” 라고 하였다.
도꾸가와도 설보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전 일본이 웃었다. 그 설보화상이 일본국에 도착한다니 조야(朝野)의 인사들이 다투워 사명대사의 대화를 하고 나누고 싶고, 친필 서명이 있는 시한편을 받으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일본 불교계의 고승들은 사명대사를 특별초청하여 법회를 열어 주었다. 사명대사는 법문을 통해 조일(朝日)은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일본 불교계가 앞장 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도꾸가와의 장남은 사명대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성대하게 마련하였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첫째 조-일의 불침략(不侵略)의 강화조약을 맺고, 둘째, 일본군에게 약탈당한 조선의 보물과, 포로로 잡혀간 동포 남녀 3500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선조(宣祖)에게 복명하였으니 우리 역사에 사명대사만한 외교성과를 얻은 분이 또 있을까?
사명대사가 도꾸가와를 만나러 왕궁에 갔을 때, 서양의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났다. 사명대사는 처음 대하는 신부에게서 처음 천주교의 존재를 설명들었다.. 사명대사와 신부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사명대사는 자신의 목에 건 108염주를 신부에게 신표(信標)로 주었고, 신부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은제(銀製) 십자가를 신표로 건네주었다. 사명대사는 신부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귀국길에 십자가를 소중히 조선에 가져왔다.
사명대사는 귀국했을 때 스승인 서산대사에게 천주교에 대해보고 드리면서 은제 십자가를 서산대사에게 증정했다. 서산대사는 은제 십자가를 소중히 보며 보관하다가 입적의 때가 오자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지품 일체를 지금의 해남군 대흥사로 보관할 것을 유촉했다.
왕은 대흥사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어필을 내려 서산, 사명, 뇌묵의 임란의 구국 영웅들을 제향을 받들게 하고, 유물을 보존하도록 하였다. 사명대사가 가져온 십자가도 이때 대흥사 유물관에 보관되었다.
1971년 봄, 필자는 해인사에 있는 지금의 해인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대흥사를 찾았다. 대흥사의 북쪽 건물에는 서산, 사명, 뇌묵 대사의 제사를 해마다 모시는 임금의 글씨인 표충사(表忠祀)가 있었다. 당시 표충사에는 서산, 사명, 대사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때 나는 표충사 건물 옆에 있는 오래되어 붕괴직전인 요사채에 방하나를 얻어 무거운 걸망을 내려놓았다. 당시 대흥사 주지는 임기산(林基山)스님이었다.
당시 나는 대흥사 대웅전, 그리고 표충사에 참배하고 서산, 사명대사의 유물이 있는 유물관(遺物館)을 구경했다. 유물관은 60대의 처사 한 사람이 지키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표충사의 구석방에서 기거하며 표충사와 유물관을 지키면서 관람객들에게 유물의 내력에 대해 설명을 했고, 그다음은 자신이 구석방에서 붓글씨로 쓴 부적 같은 붓글씨를 보여주며 소지하면 액운이 물러가고 재수가 있다면서 판매하여 용돈을 짭짤하게 벌고 있었다.
유물관을 지키는 처사에게 마을에서 40대 후반의 여자가 가끔씩 맛있는 음식과 술병을 들고 찾아왔다. 젊은 여자가 올 때는 유물관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필자가 처음 유물관을 찾았을 때도 처사는 방안에서 그녀와 함께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필자는 텅빈 유물관에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안내문이 있는 십자가를 보았다. 십자가는 족히 20cm는 되어 보였다.
필자는 십자가를 들어 응시하며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를 간절히 생각하며 주인 없는 유물관의 보물들이 언제인가, 도씨(盜氏)에게 잃어버릴 것을 상상하며 안타까워하였다. 유물장에는 진짜 금불상이 두 점이 전시되었다. 입상의 금불상과 반쯤 앉은 관음상이 있었고, 다도(茶道)로 유명한 초의(草衣)스님의 친필 서책도 몇 권 있었다.
필자는 대흥사에 오래 머물지 않고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20여년이 흐른 후, 대흥사를 찾았다. 예전의 대흥사 주지는 노래에 가난한 빈가(貧家)의 10대 소녀와 환속하여 자식들을 셋 낳았다.
표충사를 지키는 처사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제행무상으로 낙루(落淚)하면서 표충사를 찾아 세 분 조사(祖師)인 서산, 사명, 뇌묵 스님의 진영 앞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삼배를 마치고 진영을 우러르니, 예전 내가 본 조사들의 진짜 진영이 아니다. 최근에 급조된 실력 부족한 화공의 그림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확인해보니 대흥사 종무소의 한 소임자가 숨겨 논 서울에 처자의 생계를 고민하다가 은밀히 큰돈을 받고 표충사의 세 분 진영들을 원하는 일본으로 팔려가게 했다는 전해오는 얘기기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유물관에는 초의스님의 친필 문집과 입상의 금불상, 비스듬히 앉아 있는 화관을 쓴 관음상도 보이지 않았다. 은제 십자가도 사라져 버렸다. 돈을 화두로 삼는 인간들이 탐욕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십자가는 어디로 갔을까? 이땅에 사명대사의 손으로 들어왔고, 서산대사의 손에 소중히 간직되었던 십자가는 한국 천주교에 전해지던 한국 사찰에 보물같이 대우해야 하였다. 그 십자가는 불교와 천주교와의 우의(友誼)의 표상이요, 천주교에 전해지면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것이다.
낙심한 필자는 훗날 유물관의 처사가 아끼던 여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을 때, 도적이 십자가를 훔쳐 화력 좋은 불로 녹여서 은값으로 팔아먹고, 또 다른 유품을 훔치려다 들통이 나서 감옥에 갔다는 것이었다. 도적의 안목에는 천주교의 보물이 고작 은덩이로 밖에 안보였던 것 같다. 여인도 처사로부터 유물전의 유품을 선물받았다는 고백도 나에게 하였다. 그 시절 진짜 대흥사 표충사 유물전은 무주공산(無主空山)격이었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임금이 칭찬하고, 벼슬을 내리고, 사대부들이 칭찬하고 우대하는 바람에 승속(僧俗)간에 우대를 받으면서 밤에는 곡차 대접을 받아 대취하야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소식을 인편에 들은 서산대사는 정색하여 화급히 사명대사를 불러 시급히 서울을 떠나 인연 있는 산으로 돌아가 수행하며 여생을 마칠 것을 엄명하였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깊은 가르침을 깨닫고 멀리 북의 묘향산 쪽에 큰 절을 삼배 올리고, 평소 죽고 싶었던 장소인 해인사로 들어갔다. 사명대사는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서 입적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십자가가 도적의 손에 의해 불에 녹여 은덩이로 팔렸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통석해 하실 것이다. 사명대사에게 실망을 주는 자가 어찌 십자가를 훔친 도적뿐일까?
먼 훗날 어느 인물 좋은 조계종 승려는 사명대사와 대표적으로 인연 있는 밀양 표충사 주지로 있으면서 표충사의 땅과 표충사 옆 사명대사의 부모가 잠든 묘역까지 몽땅 밀매(密賣)하여 돈으로 만든 후 외국으로 도망가 외국의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탕진하였다.
그는 돈이 떨어져 귀국하였을 때, 민완형사들이 붙잡아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 간 전직 승려는 내가 이 글을 적을 때는 감옥에서 출소하여 다시 승복을 입고 사찰에서 또 돈을 위해 무슨 잔꾀를 부릴까?
장충단 공원에서 해마다 사명대사 동상 앞에 필자를 비롯한 소수의 승려들과 선남선녀들이 추모제를 지내어도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총무원장은커녕 간부 한 명도 추모제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시정할 일 아닌가?
문민정부 때부터 전염병 창궐하듯 하는 불교계 좌파 승려들은 공산주의 사상적으로 해석하여 세미나를 열어 사명대사가 민중은 외면하고, 왕인 선조(宣祖)에 충성한 못된 호국불교를 한 대표적인 권력의 시녀로써 속세의 고관지위와 금품을 받고 허명으로 유명해졌다고 비난을 퍼붓는 세상이 되었다.
끝으로, 그러나 사명대사가 인진란 때 호국사상의 실천으로 일본군과 싸우고,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본에게 약탈당한 조선의 보물과, 포로로 잡혀간 동포 남녀 3500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선조(宣祖)에게 복명한 역사의 기록을 보면, 한국사에 사명대사만큼 휼륭한 승려가 또 아디에 있을까?
승속 간에 이렇게 큰 인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명대사에게 공경의 합장 배례를 하며, 사명대사가 일본의 신부에게서 소중히 조선에 가져온 은제 십자가가 고직 은덩이로 팔려 사라진 것을 한없이 아쉬워한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