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법난 40주기 기념법회에 참석하고...
나는 극심한 어지러움 속에 비틀거리며 10,27 불교법난 40주기 기념법화와, 법난 희생자를 위한 천도재에 참석하기 위해 10월 27일 오전 11시 조계사 법당 앞 도량에 나갔다. 부처님 탱화의 큰 괘불 앞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스님들과 법난 피해자 스님 10여 명과 나는 의자에 앉아서 나의 건강 때문에 마지막 여정으로 삼으면서 천도재에 동참하였다.
80년 10,27 불교법난이 엊그제 같은 데, 40주년이 흘렀다.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 속에 조계종 선배스님들이 법난 때 군인들에게 당한 고문과 집단 폭행후유증으로 많아 죽어나갔다. 당시 아직 홍안이었던 나도 이제는 70이 훌쩍 넘었고, 곤궁과 병고에 시달리며 40주기 기념법회를 마지막으로 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심한 어지러움 속에 의자에 앉아 잠시 회상에 잠겼다.
신비하게 표현하면, 나는 전생에 인연 따라 전북 고창군 고수면에 태어났고, 전생에 인연 따라 선운사(고창군 아산면 삼인리)로 출가위승 하였다.
눈내리는 겨울 날에 눈 속에 선운사를 찾아갈 때, 조용히 떠올리면 상기도 또렷이 들려오는 것은 앙상한 겨울 나무쪽에서 들려오는 목탁조(木鐸鳥)가 내는 소리이다. 목탁조 소리를 환영사로 들으며 눈 속의 선운사를 찾았을 때, 당시 나는 불우한 환경에서 신음할 때였다.
6,25 김일성의 군대는 사납게 나의 고향에 진주해왔고, 기다렸다는 듯이 토착 빨갱이들이 몽둥이 죽창 등 무기를 들고 반동분자를 찾아 타살하던 그 때였다. 청상과부인 농부인 어머니에게 밤에 면장직을 지내던 고모부와 고모가 찾아와 고모부를 집 뒤 땅굴에 숨겨달라는 간청을 해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시키는 대로 숨겨주다가 어느 날 고모부가 절친한 친구 만나러 나갔다가 절친의 베신과 신고로 고모부는 붙잡혔고, 그동안 우리 집 뒤의 땅굴 속에 피신한 것을 토설하고, 이어서 붉은 완장들은 고모부를 죽창으로 죽이고, 숨겨준 어머니는 몽둥이로 무차별 폭행하여 피투성이로 쓰러뜨린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인생에 뾰족한 수가 없어 선운사를 찾은 것이다. 당시 나의 스승 운기(雲起)스님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라고 훈계하였다. 운기스님은 불경의 대학자로서 유명했고, 나를 통찰한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선운사에서 산 설고 물 설은 합천 해인사로 걸망 하나 달랑 메고 길을 떠났고, 5년 후 해인사 강원 11회로 졸업장을 오전 11시에 받고, 접심을 먹은 후 사교입선(捨敎入禪)한다는 마음으로 오후 1시경에 해인선원으로 입방했다.
해인강원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평을 받고, 학생회장 격인 입승을 보던 내가 졸업과 함께 해인선원에 들어왔다고 선승들이 환영해주었다. 당시 해인선원은 이성철(李性徹)스님이 방장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나는 해인선원과 동화사 금당선원 등 3년을 선원에서 화두를 들고 면벽참선에 정진하였다. 당시 나는 면벽참선하면 부처님처럼 깨닫는 줄 알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수행법은 달랐다. 화두공부는 중국 승려들이 창안한 것일 뿐이었다.
나는 우연히 걸망을 메고 해제 때 만행 길에 우연히 대선배의 노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이 한평생 선수행한 경험담을 들려주고, 나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부처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해야 하는 데 면벽참선으로 중생에게 무슨 요익중생(饒益衆生)하겠느냐”는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학문을 하여 부처님의 자비를 전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는 나에게 산사는 잿밥과 시주 돈을 좀 더 많이 차자하기 위해 혈안으로 투쟁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진흙속에 연꽃같이 부처님을 닮는 수행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었다. 그 후 나는 인생의 로정(路程)을 바꾸었다.
그 후 나는 78년 10월 1일부로 조계종 기관지 대한불교 편집국장으로 일했고, 주필까지 했다. 반정부적인 비판문을 쓴다고 보안사 서빙고 분살에 불법 연행되어 집단 폭행으로 척추가 깊게 다쳤다. 그 후 또 나는 10, 27 법난의 피해자가 되어 보안사 요원 등에 동네북이 되어 또 맞았다. 나는 여성복과, 돈복도 없고, 정보가관에 매복은 있는 것 같았다.
또 서울의 어느 구청장이 매일 아침 9시면 구청 확성기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방송해서 내가 “애국가”나 “새마을 노래”를 방송하라는 조언을 하는 비판문을 발표하니 나를 고소했다. 명예가 심각히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구철장은 나를 고소하여 나에게 4백만 원의 벌금형을 받게 했다. 아아, 그동안 적색가(赤色歌)로 유명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서울 구청마다 다투워 방송하고 있었으니 대한민국이 아직 존재하는 게 미국 덕이 아니겠는가.
청와대의 권부에 시녀같이 아부하여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국립공원 등 명산명찰에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소위 사판승(事判僧)들은 권부의 지시를 봉대하여 나를 미워했다. 왜 권부가 좋아하는 글을 써야지 싫어하는 글을 쓰냐는 질타이다. 한국의 권부는 권력을 유자하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책 보따리를 들고 남한강 가까운 곳에 홀로 은거하고 말았다. 그런데 속세의 인연이 다했는지, 3개월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이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것이다.
나의 어지러움에 대하여 큰 병원의 신경과에 가면 이석증이라 진단했다. 이비인후과에 가면 이석증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과에 가면 당뇨약과 고혈압 약만 줄 뿐이다. 한의원에 가면 보약을 먹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고정수입이 노령연금 30만 원 뿐인 내가 무슨 보약인가?
오직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수빡에 없다고 각오를 다지며, 이번에 10, 27 기념법회에 마지막으로 나간 것이다. 정부는 10,27 보상비로 1500억을 책정하였다는 데, 총무원은 그 돈 위에 불교신도들의 시주금을 받아 무슨 기념관을 짓는다 한다. 독립운동도 민주화 운동도 아닌데 무슨 기념관인가. 위조지폐라도 몽땅 안겨주어 할 탐욕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나는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부처님처럼 왕자 출신도 아니고 하안 코끼리로 어머니의 태중에 온 신비주의 탄생도 아닌 한국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일 뿐이고, 6,25 전쟁 때 토착 붉은 완장들에 의해 인생 초년의 고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각인되었다.
천만 다행히 나는 불가(佛家)를 의지하여 행복하였고, 내 나름대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진력해왔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은 이제 미국의 강력한 리더 십 부재로 친중공파(親中共派)들이 정치권에 득시글 하는 시대가 되었다.
친중공파의 창궐은 제2 한국 전쟁만을 초래할 뿐이다 고 나는 경고한다. 한-미 동맹으로 100년간 전쟁이 없이 평화 속에 한국이 번영했으면 나는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文정부들어 더욱 번미(反美)-반일(反日)의 정치를 해온다. 통탄할 일이다. 나는 심한 어지러움 속에 10,27 기념법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한다는 고별사를 하는 바이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