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0월27일 이른 아침, 조계사를 시작으로 “10.27 법난”은, 당시 보안사에 의해 무장 계엄군들이 전국 사암(寺庵)에 들이닥쳐 목표의 승려들을 강제 연행했다. 계엄군들은 군화발로 법당과 요사채 방안으로 뛰어들어 수색했다.
일명 ‘10, 27의 작전명은 조계종 총무원의 주소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에서 따온 “45계획”이었다. 민주사회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만행작전이었다. 나는 당시 총무원 국장으로 재직하다가 피해를 당하였다.
보안사의 위세가 검찰과 경찰을 초월하여 서슬이 퍼런 당시에는 승려를 불법 강제 연행하여 세 가지 방법으로 수사하고 조치했다.
첫째, 일부 승려(고운사 주지 등)는 복날 개패듯 몰매를 맞고, 삼청교육대에서 봉체조 등 고통을 받게 했다. 둘째, 일부 승려는 서빙고 등 전국의 보안사 분실에서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감금당했다. 전남 등 일부에서는 보안사 분실이 부족하여 헌병대 유치장에 가두고 고문과 구타를 하면서 강제 허위 날조 진술서를 받아냈다. 당시 대흥사 주지는 광주 헌병대 유치장에 쳐 박았다. 셋째, 일부 승려는 총무원 안에서 조사하여 진술서를 받고 강제로 파면조처 하고 감시했다.
나는 세 번째로 분류되어 총무원 안에서 조사를 받았다. 나에 대한 조사대상은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써 온 글들에 집중조사를 하고, 불교신문사 안에서 두 명의 보안사 요원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요원들은 나를 책상 앞에 앉히고, 오래된 신문철(新聞綴)을 뒤적이며 내가 쓴 사설과 여시아문(如是我聞), 천수천안(千手千眼) 등 칼럼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은 "뭐 이따위 반정부 글을 쓰나?" 나의 따귀를 치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쓰러지자 군화발로 짓밟았다. 보안사 요원 등에 조사를 받기전이나 받는 중에 요원들에게 고문과 구타를 받는 것은 당시는 통과의례였다.
보안사에 강제 연행된 승려들과 총무원 안에서 조사를 받는 승려들에게는 보안사로부터 당한 고문과 구타행위와 삼청교육대에서 받은 고통에 대해서 일체 함구한다는 일종의 ‘보안각서’를 제출해야 했다. 나는 10,27 이전에도 보안사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고도 시키는 대로 보안각서를 자필로 써서 제출해야 했다.
보안각서라는 것은 "애초에 보안사에 연행된 적도 없었다"는 보안각서였고, 만약 각서를 위반하여 고통 받은 사실을 사회에 폭로 한다면, 즉시 보안사에서 다시 연행하여 전에 받은 고통보다 더 몇 배 가혹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세뇌시키듯 강조했다. 따라서 당시 대한민국에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보안사에 불법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한 승려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승려들은 “보안각서”를 제출하고, 굳게 입을 봉한 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하나 둘 죽어가야 했다.
보안사 작전명 “45계획”에 의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난 뒤 제일 먼저 죽은 승려는 낙산사 주지였던 원철(圓徹)스님이었다.
원철스님은 낙산사 주지로 재직하면서 낙산사 주변 군부대에 법회를 자주 열어주고 위문품을 자주 전달한 군부대 지원가로 유명했다. 그런데 보안사 요원들의 손에 죽어야 했다. 그는 죽기 전, 나를 찾아왔다. 조계사 법당 앞 탑 쪽에 서 있는 원철스님을 본 순간 나는 그의 얼굴에 사색(死色)을 감지했다.
건강했을 때의 얼굴을 아는 필자는 그의 얼굴과 몸이 반쪽같이 허약해졌고, 우렁찬 그의 음성도 사라지고, 음성은 간신히 목안에서 나왔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법철이, 나 곧 죽을 것 같네. 나 죽거든 내가 억울하게 당하고, 죽었다는 것을 글로 써주게.” 그는 보안사에서 겪은 억울한 사연을 얘기 해주었다.
원철스님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후 병원에 입원했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보안사 지하실에서 군인들의 군화 발에 복부를 가격당한 도선사 전주지 모(某) 스님은 장이 파열되어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불법 강제연행의 승려 가운데는 조계종 전 종정스님과 본사의 조실스님도 예외는 없었다. 전 종정스님, 조실스님도 보안사에 연행되어 가면, 모두 승복을 강제로 벗기고, 계급장 없는 허름한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고문과 구타를 시작했다. 전 종정은 보안사에서 피똥을 싸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고문과 구타를 받고 나면, 조사관 앞에서 조작된 사건에 대한 진술서를 받게 된다.
나는 10, 27 법란 사태이전에 또 한번 심야에 보안사에 강제 연행되어 서빙고 분실에 갇혀 모진 구타를 당한 적이 있다. 조사관은 내가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것을 뻔히 알면서 생각해주는 척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적 없지요? 있다면 내게 말하시오.”
나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고 말하니 즉시 조사관은 책상 밑에 벨을 울린다. 곧바로 고문, 구타자들이 나타나 다시 나를 지하실로 끌고 앞서 보다 더 가혹하게 고문과 구타를 했다. 초죽음이 되어 다시 조사관 앞에 앉아야 했다. 또 조사관은 질문한다. “이곳에서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적 없지요? 있다면 내게 말하시오.” 나는 조사관이 바라는 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신히 신음을 참으며 이렇게 서두를 말했다. “보안사에 고문과 구타는 없었습니다.” 당시 나는 보안사 요원 4명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해야 했다. 역시 서빙고 보안사에서 일하는 군의관이 다가와 나의 고통속의 몸 상태를 의학적으로 시험했다. 그 때 나는 척추를 극심하게 군화발로 짓밟혀 남은 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조사관은 “죽으면 한강 속에 던지면 된다.” 협박을 쉬지 않으면서 나에게 북의 스파이 고정간첩이라고 혐의를 씌웠다. 국군의 방위산업을 탐지하여 북에 보고하는 스파이로 날조해버렸다. 그러나 속내의 나의 죄 내용은 필화(筆禍)였다. 일주일 후 나를 방면할 때, 조사관은 나에게 "빨갱이 스파이로 몰아 조서를 작성한 것"을 사과했다. 보안사 요원 모두가 호구지책(糊口之策)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 죄를 허위날조하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나 보안사 신세를 당해야 했는데, 첫째는 북의 스파이, 둘째는, 10,27 법난 때는 반정부적인 신문사살 등을 써 온다는 소위 필화사건(筆禍事件)이었다.
훗날, 당시 10, 27 사건 즉 작전명 “45계획”은 ‘불교정화’라는 미명이었지만, 대한민국 국운이 민주화 시절로 접어들자 ‘45계획“은 ”10.27법난“으로 명칭이 바꿔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진상조사를 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를 공감시켰다. 작금에는 정부로부터 ’10.27 법난‘ 피해자에 대한 보상비가 1천 5백억이 책정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그런데 거액의 보상비가 책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정작 10.27법난과 전혀 무관한 총무원 정치승들이 보상비를 전액 ”10.27 법난 기념관“을 짓기 위해 진력한다고 한다. 무슨 속셈인가? 기념관을 지어 자신들이 운영하고, 해마다 정부에 기념관 운영비를 받아 내자는 속셈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고문당하고 구타당해 죽은자 들과 아직 고통 속에 살아있는데, 보상비는 무슨 기념관인가?
보상비는 10.27법난 피해자들에게 전액 지급을 해야 옳다. 무슨 기념관을 짓는 명분으로 보상비를 가로채겠다는 것인가?
10.27법난은 배경에는 당시 일부 승려들은 이런 짓을 했다. 조계종의 돈과 감투싸움에 갑(甲)은 을(乙)을 척결해야 한다고 투서, 진정을 했고, 을(乙)은 갑(甲)을 척결대상이라고 투서, 진정을 했고, 병(丙)은 갑을(甲乙) 모두를 척결해야 한다고 투서, 진정을 했다. 투서, 진정서를 받은 국보위와 보안사는 조계종 고승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고승들은 갑을병(甲乙丙) 모두를 척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어찌 보면 조계종 내부의 돈, 감투싸움에 국보위와 보안사가 놀아나고 이용된 사건이 10.27법난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다.
작전명 “45계획”은 종로경찰서 근처의 현대사옥 쪽에 한옥여관으로 유명한 운당여관(雲堂旅館)에서 시작했다. 음모의 큰 방 좌장은 보안사 양모(某) 소령이었고, 측근에는 일부 군법사들이 조계종의 승려를 불법 연행하는 생살부(生殺簿)를 조언하고 작성했었다. 당시 군법사들도 10,27법난을 일으키는 조력자였다.
1980년 10월27일 아침 9시 30분경, 나는 조금 늦게 총무원에 출근하는 데 조계사 종각 쪽에 군용버스가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버스 안에는 -당시 송월주 총무원장은 보안사의 검은 승용차로 별도 연행해갔고,-조계사 주지, 총무원 각 부,국장 등이 침울한 얼굴로 좌석에 앉아 차창을 통해 다가오는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오판했다. 전날 포항제철소 견학을 간다는 말이 생각나 “왜 나를 배제하고, 자기들만 가는가?” 화를 내면서 버스에 승차를 시도했다.
이 때, 버스 앞에는 젊고 예쁜 정장한 아가씨가 손에 무전기를 들고 다가와 나의 신원을 확인하더니 단호히 이렇게 말했다. “내리세요.” 그 버스는 포항제철소가 아닌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가는 직행버스였다. 곧이어 나는 불교신문사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계종 총무원은 보안사에서 조사받은 승려들에 대해서는 무차별 중징계를 해버렸다. 훗날, 보안사에 의해 고문과 구타와 강제구금을 당하고 중징계를 당한 승려들은 이성철(李性徹) 종정스님이 법규위원회를 통해 중징계 받은 승려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나는 보안사 요원의 요구에 의해 보안사로부터 조사를 받은 적도 없고 보안사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보안각서를 제출했다. 나는 오랜 세월 보안사가 두려워 입을 봉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결론을 짓는다면, 조계종의 돈과 감투 욕심에 같은 승려에 대해 투서, 진정하는 자들, 보안사가 나서 불교정화를 해달라는 일부 고승들의 음모 탓에 10.27법난은 일어났다는 것을 밝힌다.
끝으로, 보안사의 10,27 법난은 한국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민주국가에서 유죄(有罪)라면 헌법에 의한 삼심제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민주화 시대의 정부는 모든 국민이 납득하고 동의할 보상조치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10.27법난 피해자들을 위해 정부가 주는 보상금이 있다면, 나는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주어 한다고 주장한다.
독립운동도 아니고, 무슨 민주화 운동도 아닌데, 10.27법난에 대해 무슨 기념관 건립한다며 보상금을 가로 채는 것인가? 文정부가 진짜 민주화를 실천하는 정부라면 의미없는 기념관 설립보다는 피해자들 각자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민주화 실천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2020년 10월 27일 법난일의 오전 11시부터 조계사에서 시작하는 기념식에 마지막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는 늙고 병이 깊어 마지막 기념식에 나가려 하는 것이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