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홍(鄭美紅: 1958년 7월 27일 ~ 2018년 7월 25일)은 대한민국의 KBS 한국방송공사 전 아나운서였고, 더코칭그룹 대표와 대한애국당 사무총장·최고위원을 지냈다. 그녀는 자유대한을 수호하기 위해, 또 박근혜 대통령 탄핵무효. 박근혜 석방 요구’ 운동을 가열차게 해오다가 지병으로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로 안타깝게 인생여정이 끝나 육신은 공(空)이요, 무(無)로 돌아갔고, 영혼은 한국에 환생하여 다시 자유대한 수호를 위해 헌신하리라 믿어본다. 대한민국은 문민정부가 민주화를 외치면서부터 반공이 국시였던 나라가 돌연 북-중-러가 부르짖고 공작해왔던 사회주의 국가로 돌변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정의 하고 주장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좌파의 정치인들, 학자들, 언론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저주하고 폄하 하면서 퍼붓는 욕설의 뜻은,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땅에 민주화를 하지 않고 독재정피를 했다고 맹비난을 해대고 있다. 독자 제현은 생각해보시라,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북-중-러가 비자금과 공작대를 남파하여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국 도처에서 좌파들이 무장폭동을 일으키어 준(準) 전시상황으로 총탄이 비오듯 하는 빨치산 세상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민주화와 인권의 정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좌파가 대한민국을 향해 따발총을 쏘아대고 있는데 민주화를 외쳐?
북-중-러는 제주 4,3 무장반란, 여순 무장반란, 지리산 남부군 반란사태 등 전국 도처에서 무장폭동의 배후로 활약하였다. 그들은 소기의 목적 달성을 못하니까, 마침내 6,25 남침전쟁의 전면전을 일으키었다. 전쟁중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오늘의 2020년의 민주화와 인권정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대통령은 6,25 전쟁에 미국과 유엔군을 동원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운명의 대한민국을 북-중-러의 악귀 같은 전쟁의 손에서 지켜낸 것으로 우선 기립박수와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당시 한국은 북-중-러의 침략전쟁으로 무려 3백만여 명이 비명횡사하고, 도시와 강산은 황폐화 되었을 때, 도시 빈민들과 농어촌 빈민들은 춘궁기(春窮期)는 물론 아사자(餓死者)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때,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혁명이 있었고, 그는 굳건한 한-미 동맹 속에 반공을 국시로 히고, 최우선으로 경제번영을 위해 총력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시대에는 최우선이 경제번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가 없고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쉽이 없었다면, 한국경제의 초석은 빠른 시간에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민 대통령 대부분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 한 것을 맹비난하고,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발전의 초성을 쌓은 것을 맹비난하고, 민주화를 입에 거품을 물며 맹비난하면서 도대체 무슨 정치를 해오고 있었을까?
첫째, 극민혈세를 착취하듯 하여 북핵 증강이요, 북의 세습독재를 위해 대북퍼주기를 하면서 그 정차공작이 “남북평화통일을 위해 대북 퍼주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국민혈세로 국내 북-중-러를 추종하는 좌파 지원하기에 혈안이다.
셋째, 대통령 본인과 친인척 졸개들이 국민혈세를 도적질하여 대졸부 되어 대통령직에서 떠나는 것을 상례화 한다는 항설이 지배적이다.
넷째, 문민 대통령 때, 더욱 기막힌 공작은 한국 대통령이 국민에게 평화통일을 위해 대북 퍼주기 한다는 돈을 받은 북은 수고비조로 얼마를 떼어 돈을 바치는 자의 외국 은행 계좌로 송급해 준다는 희대의 사기극이 있다는 항설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정치 수뇌는 서로 짜고 한국 국민들의 돈에 대해 사기를 쳐온다는 항설이다. 나는 文 대통령만은 마지막 꺼지 검은 돈 챙겨 떠나는 사기한(詐欺漢)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억울하게 수감되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정미홍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염천(炎天)이나 광화문 등 거리의 무대에 서서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자유대한 수호에 대한 연설, 박근혜대통령이 부당히 탄핵을 받았다는 연설과 즉시 석방을 文정부에 요구하는 연설을 해왔다.
어느 날 연설을 마친 미홍은 나에게 보안을 요하는 고백과 상의드릴 일이 있다고 하여 저녘 무렵에 인사동 들깨죽을 파는 집에서 둘이서 만났다. 그녀는 뜻밖에 내게 불교식으로 큰 절을 올렸다. 기독교인으로 소문난 미홍이 불교식으로 큰 절을 올리다니 나는 내심 놀랐다. 그녀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저는 스님의 딸이예요.”
“응? 독신승이라 주장하는 조계종 스님이 아버지라고?”
"태고종 스님이예요. 저는 스님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생각이 간절히 떠올랐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뭐하시는 분?” 질문이 오거나 서면에 밝힐 때, 아버지가 승려였다는 것을 숨겨왔어요. 승려의 딸인 것이 부끄러웠지요. 그래서 기독교를 믿어오고 있는데, 스님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나서 마음이 괴로워요. 스님께서 저에 대해 깨달음을 주셨으면 하고 모셨지요.“
나는 그 때, 미홍에게 미홍을 낳아주고 양육해주고 학교에 보낸 부모에 대한 효사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미홍이 장수(長壽)할 상이 아니고 인생 여정(旅程)이 끝나간다고 말해주고, 이제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를 깨닫고 불교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나는 약속을 받았다. 미홍의 영혼은 사찰에서 영혼천도를 반드시 행하기를 바라고, 그 때, 미홍은 나에게 약속했다.
그 날 미홍은 아버지를 연상하게 하는 나에게 ”오라버니“로 모시고 지켜드리고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 후 태고종 총무원장을 지낸 노승에게 미홍의 어버지를 확인하였다. 아버지는 태고종의 자유대한을 수호하는 애국 승려였다.
미홍은 그 후로 내게 자주 전화하고 만났다. 미홍은 가끔씩 “오라버니에 대한 선물”이라며 쇼핑백 속에 초코랫과 과자, 빵 등을 가득 담아 주었다.
마침내 미홍은 인생 여정이 끝났을 때, 흥국사(興國寺) 부처님 앞에서 영혼천도를 했다. 그 전에 죽어가는 미홍은 오히려 나를 걱정해주었다. “늙고 병든 홀로 사는 오라버니를 제가 돌봐드려야 하는 데… 죄송합니다. 어떻하지요? ” 그 때 나는 인생 도처청산(人生到處靑山)이라네.“하고 웃엇다.
정미홍의 학력은 1977년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1977년~1981년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학사, 2001년 명지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행정학 석사. 그녀는 인연 따라 한국에 여성으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하던 재원(才媛)이었고, 자유대한을 목숨바쳐 수호하던 애국자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석방운동을 하다가 인연이 다해 세상을 떠나갔다.
나는 오래전부터 당뇨병의 합병증인지 두 다리에 관절염이 와서 보수우익 집회에는 나가지 않고 혼자 자유대한을 수호하는 글을 써올 뿐이다. 예전에 광화문에 나갔을 때, 수많은 남성 애국자들과 여성 애국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정미홍을 회상하며 자유대한을 수호하던 여전사 정미홍을 능가하는 여성 애국자들만 회상한다.
흐릿하게 겨우 회상되는 것은, 어머니 연합회 회장 권명호 여사, 구교숙 여사, 채희옥 여사 최미혜 여사, 남부임 여사, 특히 윤영숙 여사는 따뜻한 보수우익 사상가였다. 이제 나의 인생 여정이 끝나기 전에 자유대한을 수호하는 여전사님들에 경의를 표하고 찬사와 기립박수를 보낸다.
끝으로, 나는 자유대한의 애국전사 정미홍을 한없이 추모하며, 또 페이스 북에 필마단기(匹馬單騎) 듯 자유대한 수호를 외치는 김유마 회장, 영옥 신 여사, キム ソオオク여사, 구숙(具淑)여사, 임영자 여사 등에는 기립박수를 하며 경의를 표해야 할 자유대한 수호의 여전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여성 애국자는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정치상황은 일부 못난 국민들의 좌파를 지지하는 선거의 투표 탓에 한국은 서서히 좌파의 바다에 침몰해가는 거함(巨艦)과 같다.
한국은 이제 선거로는 자유민주를 회복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작금의 한국은 해방직후, 그리고 6,25 직전의 좌우 대결이 되고 말았다. 전라도는 선거 때면 대부분 지역감정으로 돌변한지 오래이다. 신라, 고려, 이조도 가고 대한제국도 가듯이 대한민국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인가. 일부 국민들이 반미와 북-중을 위해 내전을 초래하는 시대에 정미홍 같은 여전사들을 한없이 그리워 한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