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영화, 혹은 느와르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스토리 중 하나...평소 기부와 사회봉사 그리고 모범적 경영으로 명망 높던 중견 기업가가 백주 대낮에 테러를 당한다. 거대 개발 사업 계약을 두고 경쟁하던 대기업이 사주한 조직폭력배의 소행이 강력히 의심되지만 검찰은 수사에 미온적이기만 하고 정부는 사건을 유야무야 덮기에 급급하다.
부패한 정권, 권력의 시녀 검찰, 기득권의 상징 대기업이라는 가해자와 선량한 약자 기업인이라는 피해자의 구도가 극명하게 형성되며 시민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피해자인 기업가 또한 폭력조직의 비호를 받고 성장했으며 기부와 사회봉사 모두 연출된 홍보용 이벤트였다는 사실. 테러사건의 본질은 결국 이권을 둘러싼 조직폭력배간 세력 다툼에 불과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이야기는 이른바 조폭영화, 혹은 느와르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스토리 구조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에서 선악은 단지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주인공들은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라면 인간성 따위 시궁창에 처박아버리는 인간군상을 연기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리는 느와르 영화는 영화계의 영원한 스태디 셀러에 꼭 들어가곤 한다.
느와르물을 보고난 후 화면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보다 찜찜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지만 그 찜찜함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중독성의 이유는 무엇일까. 보고 싶은 진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는 ‘불편함’에 있다. 불편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느와르 영화의 세계관. 그것이 바로 느와르 영화 흥행성의 본질은 아닐까.
자칭 타칭 ‘어용 지식인’ 유시민은 최근 불거진 ‘검언 유착’ 의혹을 가리켜 ‘그들은 괴물’이라며, 그들의 수장으로 윤석열을 지목하는 일갈을 토해내셨지만 그와 정치적 소신을 달리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 윤석열 검찰세력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조국이야말로 ‘괴물’에 불과하다.
아니, 백보 천보를 양보해 조국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모두 무죄로 판결난다 하여도, 조국은 ‘선인’이 아니다. 조국은 과거 부패한 기득권을 향해 끊임없이 통쾌한 비판과 저주의 SNS 문장들을 날렸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은 위법성을 떠나 그가 비난을 퍼부은 부패한 기득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조국은 과연 무슨 존재일까.
총선이 임박했다. 4년마다 혹은 5년마다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바라는 모든 인간 군상들은 미친 듯 자신이 뽑혀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그들의 레토릭은 세월이 흘러도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내)가 최선이며, 상대방은 나빠요, 나는 국민 편이며, 상대방은 아니라는 주장. 그리고 그들의 열성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유권자에게 편집광적으로 집요하게 강요하고 선동한다. 결국 선거의 승패는 누구의 강요와 선동이 더 효과적이었느냐로 판가름될 뿐이다.
‘기득권 언론과 검찰은 괴물’ vs ‘조국은 괴물’의 전쟁, ‘통합당은 토착왜구’ vs ‘민주당은 토착떼놈’전쟁.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듯이, ‘한번 적폐면 영원한 적폐’ vs ‘한번 약자와 피해자면 영원한 약자와 피해자'의 전쟁, ‘약자와 피해자는 언제나 정의롭고 도덕적’ vs ‘강자와 가해자는 언제나 부패하고 나쁜 존재’ 이 이 프레임 전쟁은 이번 선거에서 떼놓을 수 없는 명제다.
답은 느와르 영화에 있다. 느와르 영화가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에 있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100% 순수한 악인도, 100% 순수한 정의의 영웅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정치는 최상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깨끗하고 덜 부패한 세력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지 상대적이라는 개념은 나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상대방에겐 한없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쉽게 말해 ‘내로남불’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누가 더 정의로운지 누가 더 사악한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모두가 죽는 허무주의 느와르가 아니라면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은 보다 영리하고 유능하고, 혹은 보다 교활하여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차지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미치도록 정치세력에게 궁금한 한 가지는 바로 그것이다. 누가 더 영리하고 유능하여, 혹은 보다 교활하여 대학민국을 나를 더 잘살게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답 말이다.
하지만 정치세력 그 어느 누구도 나의 미칠 것 같은 궁금증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주지 못한다. 그래서 역시나 선거판의 지겨운 데자뷰는 되풀이 된다. 나는 착해요, 저 놈은 나빠요......... .
선거는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나에게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지겹고 역겹게 반복되는 ‘나는 착해요.’라는 울부짖음에서 나는 이미 그들의 본심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착해요. 그러니까 내가 일 못해도 나라 망쳐도 욕하지 마세요.’라는 추악한 본심 말이다. 결국 모두 멍청한데 어느 놈이든 50%정도만 착하다는 사실. 다시 말해 50% 언저리로 다 똑같이 나쁜 놈이라는 불편한 진실.
사흘이 지나면 선거의 승패는 어떻게든 갈릴 것이다. 누구를 선택하든 누가 이기든 그것은 느와르적 세계관을 정치에 대입한 나로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금부터라도 권력을 재단할 권리가 있는 유권자의 선택은 느와르 영화의 마지막까지 나를 살려줄 수 있는 영리하고 유능한, 혹은 보다 교활한 존재에게 가차 없이 꽂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