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정도를 지나쳤다는 뜻의 ‘교왕과정’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쓰인 ‘월절서(越絶書)’에 보이는데, 그곳에는 ‘교왕과직(矯枉過直)’으로 나온다.“
이와 같은 성어가 ‘염철론(鹽鐵論)’에도 나오는데, 그곳에는 ‘요왕자과직(撓枉者過直)’으로 되어있다. ‘한서’에 와서 비로소 ‘교왕과정(撟枉過正)’으로 나오는데, 이 책 ‘제후왕표(諸侯王表)’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나라가 세력이 왕성한 초기에는 내부가 새롭게 안정되었으나 동성(同姓)이 너무 적었다. 망한 진나라의 패배를 경계하는 의미에서 강토를 나누어 이등작(二等爵)을 세우니, 공신 제후들은 10여 개가 넘는 읍을 소유하게 되고, 왕이나 그 자제들은 크게는 아홉 나라를 아우르게 되는 등. 큰 나라는 주와 군을 넘어 수십 개의 성을 포함했다. 실로 ‘교왕과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나라 때의 학자 안사고(顔師古)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교(撟)’는 ‘교(矯)’와 같다. ‘왕(枉)’은 ‘곡(曲)’이다.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을 ‘교’라 한다. 진나라가 집안이 너무 없어 고립되었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자제들에게 많은 땅을 주는 바람에 그들이 지나치게 강성해져 정도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후한서’ ‘중장통전(仲長統傳)’에는 중장통이 지은 ‘창언(昌言)’ ‘이난편(理亂篇)’ 중에 이 말이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장통은 자가 공리(公理)로 동한 헌제(獻帝) 때(189~220) 상서랑(尙書郞) 등의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위인이 호탕하고 서슴없이 바른 말을 하는 성격이었는데, 당시의 힘없고 어지러운 정세에 불만을 품고 늘 옛날과 현재를 비교해가며 울분을 터뜨리곤 했다. 그의 『창언』은 이런 심정에서 쓰인 것으로, 모두 34편에 10여만 자로 되어 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릇 어지러운 시대는 길고 평화로운 시기는 짧다. 난세에는 소인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군자는 궁색해진다. 태평성대가 온듯하면 곧바로 ‘교왕과정’의 폐단에 빠지고 마는구나!
‘후한서’를 지은 범엽(笵曄-남북조시대 송나라 사람)은 ‘중장통전’에서 이를 논평하면서 “바로잡으러 나섬에도 치우친 마음이 작용한다면 왕직(枉直)을 지나치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구절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 있다.
맹자는 ‘교왕과직(矯枉過直)’이라 했다. ‘교(矯)’는 바로잡는다는 뜻이며, ‘왕(枉)’은 굽은 것이다. 말하자면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지나쳤다’는 것인데,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이 사치를 싫어해 지나치게 검소하거나, 너무 너그러운 것이 아닌가 걱정해서 지나치게 사나워지는 등 절충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일찍이 전국시대에 맹자가 ‘교왕과직’이라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에서는 마무(馬武) 등 이른바 ‘중흥이십팔장(中興二十八將)’의 공적과 후한 광무제가 전한(前漢)시대의 공신들에게 내린 상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결점을 바로잡은 사실을 논하면서 “따라서 광무제는 지난 일의 잘못을 알고는 ‘교왕(矯枉)’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역시 그 아래에는 이런 주가 있다.
‘교(矯)’는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왕(枉)’은 굽은 것을 말한다. 맹자는 ‘교왕자과기정(矯枉自過其正)’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한서’ 무영전(武英殿) 판본(板本-청나라 건륭 연간에 이루어진 교인본(校印本)에는 원래 있던 이 주 아래에 “지금 『맹자』에는 이런 말이 없다”는 주를 더 달아놓고 있다. 대체로 이보다 앞선 판본의 『맹자』에는 ‘교왕과직’이니 ‘교왕자과기정’이니 하는 말이 있었으나, 지금 전하는 『맹자』에는 그런 구절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맹자가 처음 이 말을 했을 때의 의미를 고찰할 길이 없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결점이나 차이를 바로잡으려다 정도를 지나친 것을 비유하는 것을 비유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한 국가 또는 단체와 단위에 불량한 경향이나 좋지 못한 습관 따위가 나타날 때, 지도자가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방법을 채택해야지, 힘만 믿고 처리해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지도자는 흔히 이런 ‘교왕과정’의 방법을 취한다. 이런 방법을 취하는 것은 마치 흰 대쪽을 곧게 펴려는 것과도 같다. 흰 대쪽을 똑바로 또는 수평이 되는 자리로까지만 눌러서는 바로 펼 수 없다. 굽은 쪽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눌러 휘게 한 다음 천천히 놓아 그 탄력으로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바름(正)’과 ‘곧음(直)’의 수평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