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용두관음의 화신으로 등장하던 미인 장보각행

2020-05-14     이법철의 논단 대표.

오늘의 주제는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숙대 메이퀸으로 뽑힌 바 있는 미모의 여인 장령자(불명 普覺行)씨의 스스로 만든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다. 그녀는 38세때부터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부터 현재까지 연속해 옥고를 치루며 기약 없는 자유를 고대하고 있다. 나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그녀가 37세로 하얀 한복을 입은 미인으로 마음에 드는 승려에게는 돈을 물쓰듯 해서 유명하였다.

내가 장보각행을 처음 본 것은 그녀의 나이 37세 때였다. 당시 그녀는 대부분 시주금을 바라는 승려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돈 봉투를 바라는 일부 승려들은 장보각행을 용두관음(龍頭觀音)의 화신이라고 보비위를 하고 장보각행은 돈 봉투를 나눠주며 아름답게 웃어주었다.

장보각행은 한국불교에는 없는 최초로 용두관음상(龍頭觀音像)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기도중에 계시하기를 “용두관음상을 봉안하여 한국사회에 전하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선언하며 불교계에 나타났다. 그 용두관음상은 중국 산동성에서 구한 골동품이라는 설이 있다.

용두관음 보살상 점안식(點眼式)에 한국불교사에 전무후무할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녀의 초청으로 전국 고승들이 대부분 참석(해인사 성철 큰스님만은 빠졌다)했다. 송광사 방장인 소구산(蘇九山)스님이 직접 목탁을 치면서 점안식을 집례하기도 했다. 근거로 집례장면은 지금도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나돌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점안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할 때였다. 앞 줄 중앙에 30대 후반의 한복을 입은 장보각행이 의자에 앉고, 좌우에는 당시 조계종 전, 현직 종정스님과 총무원장을 위시하여 전국 본사의 방장, 조실스님이 앉고, 뒷줄에는 본사 주지들, 총무원 각 부, 국장들, 종회의원들, 일반 승려들이 가사장삼을 입고 시립했다.

당시 나는 불교신문 편집국장으로 당시 종정 고암(古庵)스님의 수행기자로 있었는데, 고암스님은 장보각행의 초청에 갔지만, 나는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장보각행은, 종정급은 1천만원, 총무원장은 5백만원, 본사주지, 총무원 각 부장급은 3백만원, 총무원 국장급은 각 200만원의 봉투를 받았다.

장보각행은 나의 존재를 알고 전화로 “왜 오시지 않았지요? 월급이 24만원이던데….” 그 때 나는 퉁명스럽게 “한국불교에 족보도 없는 용두관음 제막식을 하기에 나는 불참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화를 네기는 커녕 깔깔깔 웃음으로 대했다.

장보각행이 한국 불교계에 용두관음상(龍頭觀音像)을 내세워 돈 봉투를 나눠주며 혜성같이 등장했을 무렵, 당시 나에게 신도와 승려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젊은 여자가 돈을 뿌리니 “관음보살화현”이라고 칭송하는 승려들을 꾸짖고, 한국불교에 족보(族譜) 없는 용두관음을 신앙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되니 진상을 밝혀 저지하라는 주문이었다.

당시 나는 불교신문에 호두관음(虎頭觀音)이라는 제호로 용두관음을 비판하는 기명 칼럼을 써 보도하였다. 두둑한 돈 봉투만 주면 환장 한듯 달려가 관음보살 화신이라고 찬양하는 승려들을 무섭게 비판했다.

사흘 후 장보각행을 만났다. 그녀는 반발하는 나에게 고혹적으로 웃어주면서 집에서 “스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거절한 기억이 있다.

장보각행은 단독 거액의 시주금으로 용두관음상을 조성하여 서울 칠보사(七寶寺)를 시작하여 백양사, 대흥사 등 본사에 모시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승려들은 앞 다투워 용두관음상 앞에 향화(香火)를 올리고, 목탁을 치며 기도에 들어갔다. “용두관음에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금방 이룰 수 있다“는 입소문이 돌고 우매한 일부 승려와 신도들은 용두관음보살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용두관음보살, 용두관음보살…“ 목탁소리와 기도소리는 산사에 울려 퍼졌다.

놀라운 소식은 용두관음상은 장보각행의 육신을 모델로 나무에 조각 하였다고 주장을 하는 양심선언이 있었다. 나는 고증을 해주었다는 동대 황수영 당시 박물관장에게 질문하니 “스님은 왜 그런 걸 캐시오? 불교계에 큰 시주를 하니 좋지 않습니까? 원만하게 눈감아주세요.” 고명한 황교수도 두둑한 봉투를 받고 만족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인가 밝혀지는 것이다. 장보각행은 하루아침에 건국이래 최대의 여성 사기꾼으,로 구속되고 도하 각종 언론에 특별뉴스로 등장하였다. 용두관음의 화현으로 칭송하며 “제발 두둑한 돈 봉투를 주십사” 간구하던 일부 승려들은, 훗날 그녀가 수인(囚人)의 몸이 되자 서명날인으로 구원은 커녕, 앞 다투워 용두관음상을 법당에서 내쫓고, 부수었다. 장보각행의 마음의 귀의처인 백양사에서조차 ‘바른불교’를 내세워 장보각행이 수억원을 들여 시주한 불상을 기중기로 들어내 버렸다.

2010년 6월23일(수요일) 오전 10시30분경, 나는 진주교도소 ‘여자접견소’에서 37세 때 만났던 장보각행을 만났다. 그녀는 어느 새 통통히 살이 찐 늙은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반색했다. “다른 스님같으면 안 만나요. 법철 스님이까 나왔쬬”

장보각행은 자신의 법명을 이렇게 해석하며 탄식했다.

“보각행(普覺行)은 넓게 깨닫고 실천하라는 법명인데, 이곳에 있으니 내 탓이지요. 당시 내가 어려서 스님들의 칭송에 기만당해 아상(我相)이 높았지요. 이제 깨닫고 보니 허망한 칭송이고, 진짜 관음보살 화현처럼 중생을 위해 헌신봉사 하라는 뜻인데…”

나는 그녀에게 출소하면 속세를 떠나 조용한 암자(庵子)에서 여생을 수행하면서 살기를 권장하였다. 그러나 장보각행은 발끈 화를 내었다.

“어느 암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스님은 지금 내가 내 암자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보이지 않는다면, 스님은 좀 더 수도를 하셔야겠네요.”

나는 출소하면 반드시 나를 찾아 오리고 엄명하듯 말하고 교도소를 떠나왔다.

며칠 후 장보각행은 나에게 여러 장면의 사진이 있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교도소에서 힘겹게 쓴 눈물의 편지였다. 그 편지의 회고에는 자신은 목포 정광유치원을 나왔고, 서울 서대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 있었던 계성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히고, 숙명여대를 졸업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보살은 진짜 사기꾼이 못됩니다. 오전에 사기치고 오후에 검경(檢警)에 체포되는 사기꾼은 어리석은 사기지요. 진짜 사기군은 검경이 잡을 수 없도록 법망을 피하는 모(妙)한 사기를 치지요.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지경의 수감생활을 해오는 보각행은 매우 영리하지 못한 우치한 사기를 쳐온 것입니다.” 그녀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장보각행에게 이렇게 말해주기도 했다. “우리 출소 후에 꼭 만납시다. 내가 있는 암자의 공양주를 시켜줄께요. 그 자리가 감옥보다는 백배 낫지.” 그녀는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출소 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풍문에 강남의 어느 곳에 호화로운 사무실을 차리고 예전에 하던 식의 사기 업(業)을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4년형을 또 받았다는 언론 보도였다. 그녀는 너무 우치하여 출소하면 검경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예전의 업을 하다가 또 체포되어 법원에서 4년형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자나깨나 검경에서 벗어나는 공양주 역할이 딱 맞는 직업이었다.

어느 날, 나에게 장보각행의 남편인 이철희(전 중정차장)씨가 노쇠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결론은 “장보살은 절대 제도가 안되는 사람입니다. 업대로 살도록 방관해버리세요. 스님은 헛수고를 하지 마세요. 저는 완전히 두 손 든 지 오래입니다” 그는 너무 쇠약한 음성으로 아내를 원망하더니 얼마되지 않아 저승길로 떠나갔다.

끝으로, 나의 분석에는 장보각행은 마치 “사기 게임”에 중독되듯, 감옥을 들락날 하면서 고귀한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사회를 통찰해보라. 민중들은 장보각행만한 학벌과 돈이 없으면서도 열심히 일하여 자족하고 신명나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재언컨대 그녀의 남편은 나에게 노쇠한 음성으로 아내를 두고 불교에서 말하는 제도되지 못하는 중생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녀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바라건대 하루속히 장보각행이 사기 게임의 중독에서 벗어나듯 준법정신 속에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어 신명나게 사는 민중처럼 살기를 바라고, 총알같이 빠른 속도로 지구는 태양을 윤화하고, 인생은 춘몽처럼 너무 짧다는 것을 통찰히기 바란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

▲ 1980년 장성 백양사 법회에서 장보각행이 인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