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문도들에게 화합을 당부하면서 자결한 어느 노스님.

2020-02-05     이법철의 논단 대표
▲ 양파TV방송.양파뉴스 이강문 총괄사장.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반드시 때와 장소와 배경을 설명하고, 주인공을 실제로 묘사해야 하지만, 한국의 작금에는 우선 유족들에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죄” 고소를 당하는 여부에 대해서 우선 심각히 고민해보아 한다. 한국은 남녀 간에 고소, 고발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안보상, 때는 68년도이고 장소는 해인사까지만 밝히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이름으로 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68년도 겨울에 해인사에서 나와 함께 수학하던 해공대사(解空大師)는 불교용어로 인연이 다 했는지 눈 내리는 겨울 날 홀로 해인사를 떠나갔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해공대사의 인물묘사를 해보자. 그는 출가본사가 전라도 어느 명산에 있는 명찰에서 대장경 공부를 하겠다고 67년도 봄에 해인사를 찾아왔다. 그는 키가 172cm 정도 되었고, 당시 20대 후반이었는데, 허연 수염을 더부룩히 기르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사람들에게는 귀신 이야기의 신비한 말로 설득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는 귀신과 수시로 대화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공부를 무사히 마쳤다면 나와 같이 해인승가대학 11회 졸업생이 될 수 있었지만, 그가 주도한 일이 인사사고가 일어나 책임을 지고 소위 퇴학을 당해야 했다.

68년도 눈 내리는 어느 날 아침에 그는 나에게 “아침을 먹지 말고 가야산에 오르자”고 제의했다. 나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는 해인사의 눈 내리는 하늘을 우러르며 “아침을 먹지 않고 빈속에 눈 내리는 산에 오르는 것은 자살행위요.”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나에게 화를 내고 같은 반 학인 승려 두 명을 설득하여 가야산에 올랐다.

그 몇 시간 후 사건은 발생하여 해인사를 발칵 뒤집었다. 해공 일행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발길을 돌려 해인사로 돌아오는 길에 법주사에서 공부하러온 법파(法波)스님이 맨 먼저 하산 길의 눈 속에 지쳐 눈 속에 죽었고, 또 다른 승려는 해인사 축구장 근처에 눈 속에 죽어가고, 단 해공만 혼자 간신히 해인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죽은 원인은 아침을 굶은 상태로 눈 속에 등산을 한 것이 허기지고 지쳐 죽을 수밖에 없는 원인 이였다. 해공은 혼자 아침밥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 날 해공은 해인사측에서 책임을 지고 떠나줄 것을 통보받았다.

30여년이 강물처럼 흘렀다. 어느 해 가을날, 나는 전라도 명산의 천왕봉(天王峰)에 혼자 올랐다. 뜻밖에 등산길에 나는 해공대사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손뼉을 치며 반색하였다. 그는 이렇게 만난 것은 전생에 큰 인연이라며 명찰 밑에 있는 제법 큰 모텔의 큰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내게 “무엇이단 대접할 테니 먹고 싶은 것을 말만하라”했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깨달음의 이야기를 내게 특별히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침내 명산에서 대오의 득도를 했다고 자랑했다.

그의 말인즉, “내가 깨닫고 보나”, “부처님은 산신님의 부하라는 것을 깨달았다네”라고 하였다. 그는 방안에 앉았다가 2분마다 일어나 무속인이 춤을 추듯 입을 악물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대는 것이었다. “앉아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자”는 나의 제의에 동의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2분 후면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그가 중국 무림 용어로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자면서 그의 행동을 감시해야만 했다. 자다가 그가 내게 무슨 짓인들 자행할지 모르니까.

다음날 그는 자신의 암자(庵子)로 나를 데려갔다. 암자에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은 한쪽 구석으로 몰아붙이듯 하였고, 정중앙에는 산신대전(山神大殿)이라는 큰 전각을 모시고 예배했다. 그는 주차장이 환히 보이는 길 옆 고목나무 밑에 바위에 죽장(竹杖)을 세우고 정좌하여 자기 앞에 오가는 관광객인 여성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염라국의 저승사자가 체포영장을 받아 오라줄을 가지고 오고 있는 데, 한가하게 웬 수다인고?”

기쁘게 명산에 관광온 여성들은 기겁을 하고 백수노옹(白鬚老翁)같은 해공대사에게 구명을 애원했다. 해공은 거기서 우매한 여성들을 향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 많이 벌 때에는 5백만원도 수입을 본다는 자랑이었다. 나는 불교인이 아닌 사마외도(邪魔外道)로 빠진 그를 보고 핑계를 대어 황급히 떠나왔다.

10여년이 흐른 후 나는 해공대사가 죽었다는 부고(訃告)를 들었다. 해공대사를 태우는 화장터에서 사제라는 승려의 증언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해공이 명산에서 낚시질을 그만 두고 농약을 먹고 자결했다는 것과, 유서의 요지에 “사랑하는 문도들이여, 서로 싸우지 말고 화합하라!”는 유훈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아 왜 자결해야 만 했나? 나는 통탄했다.

그러나 사제의 증언에 의하면, 놀라운 반전(反轉)이 왔다. 해공이 유서에 남긴 사랑하는 문도들은 해공의 두 부인과 각기 소생의 자녀들이었다. 해공은 두 부인에 각기 생활비를 주어 왔는데, 두 부인들이 서로 “네 돈 봉투가 크고 나는 적다”는 것 때문에 만나면 머리책을 잡고 싸우고, 두 여자가 해공앞에 원망하며 통곡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해공이 아무리 명산의 고목 밑 바위에 앉아 낚시질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각기 자녀를 가진 두 여자의 탐욕에는 감당할 수 없어 “문도들의 화합을 간절히 당부하며” 농약을 마시고 열반에 들었다는 사제의 증언이었다. 또 사제의 증언에는 해공대사가 그동안 장신병원에 다년간 입원하여 치료를 했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나는 그 때, 아득한 지난 세월의 해인사 시절에 도반 학인들에게 아침밤을 굶기고 논 내리는 가야산을 오르게 한 것도 사전에 준비한 사이코적인 발상이 아니었을까? 나는 해공의 정신이상의 애기를 들으면서, 지난 날, 하룻밤을 함께 잠을 자고 난 것이 무서운 공포로 돌아왔다.

끝으로, 그동안 나는 70이 넘게 불교계에 살아오면서 절감해지는 것은 사랑하는 문도(?)를 위해 부처를 팔아 오직 돈을 버는-낚시꾼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과 부처님의 거룩한 행을 중생에 전하는 휼륭한 수도승도 많지만, 해공대사처럼 유언장에 쓴 문도들에게 생활비를 넉넉히 주기 위해 온갖 사기협잡질을 해대는 승려는 부지기수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전생에 지은 업연에 의해 고달프게 살아가는 중생에게 자비실천과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지는 못하면서 오직 부처팔아 자신의 문도(?)들만을 위해 돈을 악착같이 벌려는 요마(妖魔)같은 자들을 진정한 부처님으로 믿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나는 경종을 울리는 바이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