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낙선재(樂善齋)의 추억

2019-11-19     이법철의 논단 대표.

집안의 내력병인 당뇨가 심해지더니 나에게 합병증이 심각히 오는 것같다. 눈에는 녹내장이 왔다고 서울의 종로 공안과에서는 걱정을 해주고, 무릅 관절의 통증이 오더니 급기야 하지정맥류가 생격 종아리 통증이 심해져 잠이 잘 안온다. 또 발가락 열개와 손가락 열 개의 끝이 바늘로 쑤시듯 아파온다. 수도승도 생노 병사는 피할 수 없는가 보다. 통증가운데 좌선자세로 피곤하여 혼곤히 졸고 있는 데,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보니 뜻밖에 일본 국영방공사인 NHK TV부서라고 하면서 웬 50대 후반의 여성이 예전에 내가 만났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영친왕비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다. NHK 기자와의 만날 장소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정문 옆에 있는 나무 카페에서 2019년 11월 19일 오후 1시경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나는 잠시 아득한 추억의 회상에 잠겼다.

나는 조계종 승려로서 70이 넘게 살아오면서 부지기수의 많은 남녀 불교신도를 만난 경험이 있다. 그 가운데 영친왕비 이방자여사와의 만남과 대화도 있었다.

내가 창경궁안의 낙선재(樂善齋)에서 영친 왕비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명함을 건네며 전주이씨 집안의 효령대군 후손이라고 밝히자 반색하며 나를 “일가 스님”이라고 호칭해주었다. 나는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영친 왕비를 “비전하”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여 나도 “비전하”라고 부르자 영친왕비는 나를 만류하며 “이 노보살”이라고 호칭할 것을 엄명하듯 하였다.

1978년 10월 1알자로 나는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훗날 불교신문 개칭)편집국장직을 임명받았다. 당시 조계종 종정직은 윤고암(尹古庵)스님 때였다. 다음해 정초에 나는 이방자여사에 대한 연재물을 집필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노트 등을 준비하고 낙선재를 찾아 도보로 걸었다. 낙선재는 조선 헌종 13년(1847)에 후궁 김씨를 위해서 지은 전각인데, 이방자여사가 거처했고, 덕혜옹주도 함께 있었다. 금남(禁男)의 낙선재 안방으로 나를 인도하는 인연은 이방자여사가 내가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이방자여사는 은은히 미소하고 “효령대군 할아버지도 절에 계셨었는데, 후손도 승려 생활를 하고 있네요. 얼굴을 보니 전주이씨의 얼굴이구만. ” 이방여사는 나를 안방으로 인도하여 차를 내왔다. 이 때 방안 구석에는 하얀 한복에 노란 색 조끼를 입은 이마가 너무 많아 벗겨진 이방자여사와 또래 여인이 추운가 화로를 안고 잔뜩 불안에 빠진 눈빛으로 나를 두렵게 처다보았다. 그녀는 정신이 이상해보였다. 이방자여사는 그녀를 소개하며 고종황제의 따님인 덕혜옹주“라고 소개하며, 큰 소리로 ”이 스님은 효령 할아버지의 후손인 우리 일가스님이예요. 인사하세요. “

덕혜옹주는 나를 건내보며 ”아-그런가? “ 하고 반짝 안도하는 듯 하드니 다시 불안해졌다. 내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이방자 여사는 연재물에 대한 인터뷰를 사양했다. 자기는 ”조용히 일본 천황이 내린 칙명(勅命)을 실천하며 살 뿐”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이방자 여사는 나에게 “제행무상(諸行無常)”_의 붓글씨을 써주며 간직하라고 했다.

나의 근무지를 자세히 묻고 조계사 부처님을 참배하러 갈 때, 나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낙선재 안방은 난방이 되지 않는 지 차가운 냉기가 가득 돌았다. 당시 영친왕비와 덕혜옹주는 너무도 차가운 냉방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고 있었다.

이틀 후 오전 10시 30분경 불교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노보살님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있어 나가보니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하얀 마스크를 쓴 이방자 여사가 서 있었다. 나는 순간 “비전하”라고 부를 뻔 했다, 나는 그녀를 조계사 큰 법당의 부처님께 인도하여 참배하게 하고, 인사동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덕혜옹주님이 고국에 돌아오듯 노보살님도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시지요. ”

이방자 여사는 단호히 정색을 하고 “나는 칙명을 받고 한국에 왔습니다. 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칙명을 따를 뿐입니다.” 덕혜옹주도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았지만,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방자 여사에게 물었다. “일본 여성들은 칙명에 모두 복종하는가요?“ 이방자 여사는 ”그렇다“는 듯 정색을 했다.

당시 이방자 여사는 한국의 소년소녀 장애인을 돕는 자혜원(慈惠院)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방자여사의 친자 두명도 죽고 남편도 죽어 혼자가 되었어도 자기의 전재산을 지원하여 한국의 장애인 소년소녀를 돕는 자모(慈母)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방자 여사는 차를 마시며 일본이 추구하는 총력전(總力戰)을 통해 대동아공영을 추진하는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이방자 여사를 언제나 창덕궁 앞 쪽까지 전송했다. 나는 이방자 여사에게 누(累)를 끼치거나 인구의 구설수에 오를 까봐 낙선재를 자주 찾아가지는 않았고, 언제나 이방자 여사는 조계사 법당을 참배할 때면, ”일가 스님“인 나를 찾았다. 나는 그녀의 부탁대로 영친왕비로 밝히지 않고, 오직 ”이 노보살님“으로 호칭했다.

나에게 총무원을 강제로 떠나게 되는 불행이 닥쳐왔다. 1980년 10월 27일 오전 10시경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 요원들이 군용버스 등을 동원하여 조계종 총무원에 들이닥쳤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은 물론 각 부장, 국장, 조계사 주지 등이 강제로 불법 연행되어 군용버스에 실려 보안사 서빙고 조사실에 수감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해야 했다.

나는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신문사 편집국장실에서 그동안 내가 써온 사설과 컬럼 등을 트집잡아 무수히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 시절에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양축이 되어 최고권력자의 지시에 의해 승려들의 불법연행과 구타와 감금이 빈번한 비민주, 무인권의 군부독재시대였다. 나는 80년도 이전에도 보안사 서빙고 조사실에 불법 연행되어 간첩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고, 일주일간 감금되어 다수의 보안사 요원들에게 모질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보안사에서 구타와 고문을 한 뒤에는 군의관이 다가와 질문한다.

80년 10월 27일부터 있은 보안사가 주동이 되는 한국 불교탄압은 전국적이었다. 법원의 영장도 없이 마치 개,돼지 잡아가듯이 미운 털 박힌 승려들을 불법 연행하여 감금하고 고문하고 구타했다. 어두운 밤길에는 검은 세단의 차를 타고 사복을 입은 보안사 요원들이 종로서 등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고 형사인척 하면서 서빙고 등으로 불법연행 해갔다. 그러한 불법을 경찰과 검찰과 법원에 하소연할 수가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

 

나는 소위 80년 10월 27일에 벌어진 불교법난으로 모진 구타를 당하고 파면되어 조계종 총무원에서 해남 대흥사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서울을 떠나가 전 날 낙선재를 찾아갔다. 나의 떠나야 하는 설명을 듣고 이방자 여사는 안타까워하며 나의 두손을 잡아주면서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꼭 다시 만나요(再見). 금생이 아니면 내생에서러도…. 나는 내생이 분명 있다면, 칙명을 받지 않는 황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답니다. 일가스님 잘 가요.” 마침내 나는 구타당해 아픈 몸으로 해남 대흥사 대광명전의 구석방에서 혼자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나는 1989년 4월 30일, 이방자(李方子, 1901년 11월 4일∼1989년 4월 30일)여사가 낙선재에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부처남전에 분향하여 명복을 기원했다, 그녀는 당시 일본 제국 황족출신이며, 천황의 칙명을 받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 은(懿愍太子 垠)의 비(妃)가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칙명을 지켜 한국에서 떠나지 않고 한국 장애인 소년소녀를 위해 헌신봉사를 하고 세연을 달리했다.

 

그녀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칙명을 받들어 그리운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인 남편 곁에 묻힌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생전에 나에게 약속을 하라고 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비전하는 천황의 칙명을 실천하고 지켰다”는 이야기를 특히 고국 사람들에게 전해주라는 간절한 부촉의 약속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금도 지키기 위해 이 글을 적는다.

 

2018년 창경궁 안에 영친왕비가 가장 좋아하는 벚꽃이 만개한 어느 날이었다. 나는 혼자 닉선재를 찾았다. 낙선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집이었다. 나는 방문 밖 섬돌에 서서 영친왕비가 내게 써준 제행무상의 붓글씨의 뜻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친왕비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칙명을 끝까지 지키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영혼은 한국에 있을까? 영친왕 곁에 영면해있을까? 아니면 일본에 돌아가 소원하던 대로 황족이 아닌 펑범한 여성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을까?

 

영친왕비가 나에게 간곡히 거듭 강조하던 부촉의 말이 생각이 났다. “한국과 일본은 한가족 같이, 불변의 친구처럼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을 생각했다. 이때. 낙선재 마당 안으로 일본 젊은 여성 관광객 20여 명이 들어왔다. 안내원이 핸드 마이크로 소개했다. ”여기 낙선재는 일본 황족인 영친왕비가 마지막까지 살던 곳으로….“ 나의 시야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처녀 한 명이 영친왕비가 기거하던 방안으로 보면서 소리죽여 흐느꼈다. 왜 그럴까? 영친왕비를 동정해서일까? 그 처녀는 돌아서서 나를 보았다. 과연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그 일본 처녀는 나를 보고 눈물 속에 활짝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목례를 정중히 했다. 나는 그 때 속으로 놀라운 마음이 되어 중얼거렸다. (아아. 비전하가 소원대로 평범한 여성으로 환생한 것인가.”) 그녀는 다시 내게 목례를 해주고, 일행들 속에 석여 눈발이 흩날리듯 바람에 낙하하는 벚꽃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후일담이다. 나를 보고 겁먹은 얼굴이 되어 정신 이상기를 보여주었던 덕혜옹주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울에서 전북의 전주까지 가서 전주의 길을 정신없이 해매다가 쓰러졌고, 행여병자(行旅病者)로 죽었다. 그녀의 수중에는 동전 한 개도 없는 극빈자의 신세였다. 고종황제의 유일한 딸인 덕혜옹주의 말년은 진짜 제향무상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영친왕비에 대한 인터뷰를 하자는 NHK의 TV부서의 여기자 남자기자는 약속한 나무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는 연변 말투의 수상한 남녀들이 보이스 피싱을 곧잘 하는 데, 이번에 나에게는 NHK TV부서의 기자라고 나를 기만한 것이다. 놀라운 반전(反轉)이 아닐 수 없다.

 

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