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문칼럼] 민족고유 최대명절 '설', 신정-구정의 유래

우리가 흔히 쓰는 '신정(新正)'과 '구정(舊正)' 구분의 시작은 일제시대의 잔재다.

2019-02-04     이강문 주필
▲양파방송.양파뉴스 이강문 총괄사장.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설날의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일이면 민족 대명절 '설'이다. 설 명절 때, 우리는 친지들과 모여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 전통 민속놀이를 해본 경험은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날과 관련해,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다. 흔히 부르는 신정과 구정은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신정', '구정'?

지인들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안부인사를 전하는 우리민족 가장 큰 명절인 설날을 왜 신정과 구정이라고 나눠서 부르는 것일까? 설날 명칭의 유래는 현재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신정(新正)'과 '구정(舊正)' 구분의 시작은 일제시대의 잔재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양력제'를 쓰기 때문에 '음력제'를 쓰는 우리 민족에게 그들의 문화를 강요했다. 더불어 광복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음력설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몰아가며 한동안 국민들은 신정 즉 양력설 때 연휴를 보냈다.

반면 전통적으로 조상들께 음력설 때 차례를 지냈던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반발심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에 정부는 지난 1999년 신정은 하루를 쉬고 4일 설 연휴를 쇠는 지금의 '설'을 지정했다.

한동안 양력설에 친지들을 만나러 내려가던 모습이, 지금의 제 모습을 찾은 시기는 불과 25년 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해 처음으로 맞이하는 민족 대명절인 '설'은 친지, 지인들과 덕담을 나누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새로움을 의미하는 '설 명절'되길...

설은 차례로 조상을 모신후, 준비한 설 음식을 함께 나누며 그동안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기신년 돼지의 해가 시작된 후, '금연', '저축', '다이어트', '학업증진' 등 수많은 계획을 세웠으나 '작심삼일(作心三日)'화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설 연휴를 터닝포인트로 삼아 다시한번 새해 결심을 되세겨 보는 것은 어떨까?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며 대화가 단절된 최근,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과거보다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명절을 계기로 그동안 가족들과 가져보지 못한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역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1월 1일)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895년 음력에서 양력을 공식적으로 쓰이면서 설날은 그 의미가 약해졌다. 대신 양력 설인 신정이 큰 의미를 맞게 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설의 수난은 오랜 동안 지속되었다. 일본총독부는 1936년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 우리글,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고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기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우리의 설도 양력설에 빼앗기게 되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주지마당

일본총독부는 민족의 큰 명절 '설'을 '구정'이란 말로 격하시켜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 광분하였다. 광복 후에도 양력이 기준력으로 사용됨으로써 양력설은 1989년까지 제도적으로 지속되었다.

음력설인 고유의 설은 '민속의 날?이란 이름으로 단 하루 공휴일이었으며, 이중과세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억제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은 고유의 명절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1989년 2월 1일 정부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고쳐 설날인 음력 1월 1일을 전후한 3일을 공휴일로 지정, 시행하여 이젠 설날이 완전한 민족명절로 다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식민지 시절의 쓰레기라 할 수 있는 '구정'이란 말을 삼가고, 절대 '설날'이란 말을 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