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의 인연이 있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온 사람들은 왜 인생을 부귀영화 속에 행복하게 살다가지 못하는 것인가? 전지전능한 신불(神佛)이 장난을 치는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부귀영화 속에 인생을 시작하는 남녀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 복진타락(福盡墮落)으로 결코 원하지 않은 수명의 요수장단(夭壽長短)과 빈궁(貧窮)이 불시에 닥쳐온다. 태어나면서 사망할 때까지 행복은 희소하다.
그러나 속세의 전해오는 얘기는 “안생에 있어 만사는 다 정해졌다(萬事皆有定)”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한 군거로 조선조 숙종 임금이 겪은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적시(摘示)하고자 한다.
그 해 달 밝은 추운 어느 겨울 날, 숙종(肅宗)은 변복하여 변복한 내관과 함께 남산골 가난한 서민 촌을 찾아 나섰다. 밤이 깊어 대다수 사람들은 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무너져가는 듯한 낡은 초가집 한 채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고, 방안에서 웬 사내가 낭낭히 “ 공자와 맹자왈” 글을 읽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글 읽는 목소리는 어린 청소년이 아닌 늙수구레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숙종은 소리죽여 초가집의 싸립문 앞에 서서 방안의 글 읽는 소리를 한참 듣고는 점잖게 “주인장”을 찾았다.
방안에 사내는 문밖의 인기척을 느끼고 방문을 열고 나와 손님에게 예를 갖추어 절하였다. 숙종은 자신은 지나가는 과객(過客)인데, 야심한 밤에 글 읽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주인을 만나 대담을 하고 싶어 주인을 찾았노라고 전제하고, “무례를 용서하시라.”는 인사말을 정중히 했다.
글 읽던 사내는 “내 집에 귀한 손님이 왔는데….” 하며 숙종을 방안으로 안내했다. 방안에 불빛을 통해 보니 글읽던 사내는 40대 중반이었다. 사내는 숙종과 수인사를 정중히 한 후 부엌에 들어가 삶은 고구마 몇 개를 그릇에 담고, 물을 그릇에 담아 작은 밥상에 얹어 오더니 숙종에게 권하며 부끄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
“집안이 가난한지라 대접할 것이 이것뿐입니다. 드시지요.”
숙종은 예의로서 고구마를 권하는 것에 감동하여 고구마를 먹으면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고, 사내는 대답해주었다.
숙종의 질문에 사내는 자신의 신세를 자책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병든 아내를 좋은 약첩으로 치유시켜주지 못한 지아비의 무능력에 병든 아내는 죽고, 자식도 없이 혼자 살며 동네 아이들에게 천자문 정도의 글을 가르키는 훈장(訓長)으로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고 있다고 했다.
숙종은 훈장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이렇게 말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해서라도 집안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소? 왜 진즉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소?”
훈장은 더욱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답했다.
“저는 20전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했었지만, 운(運)이 안 좋아서인지,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시험만 치면 낙방할 뿐이었습니다. 번번히 내가 과거 시험에 낙방을 하자 아내는 희망이 없어 슬피 울다가 병이 들어 신음 속에 그만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지요.”
훈장은 장탄식을 토하고는 또 이렇게 말했다.
“옛 성현이 ”운명은 정해졌다(萬事皆有定)“고 하셨듯이 제 운명도 다 정해진 것 같습니다.”
훈장은 이어서 탄식하듯 이렇게 말했다.
“저도 이제는 과거 시험을 보겠다는 생각을 접은 지 오래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성현의 글을 조금 읽었을 뿐입니다.”
숙종은 가난하지만, 착하고, 예의바른 훈장의 정해졌다는 운명을 바꿔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직히 이렇게 말해주었다.
“내 친구가 대궐에서 일하는 데, 일주일 안으로 임금님이 인재를 구하기 위해 특별시험인 전시(殿試)를 베푼다는 정확한 정보가 있습니다. 시험 정답의 답안지(答案)에 대해서 정보를 알려 주는 데…. 이렇게 하면 합격합니다.”
숙종은 주위를 살피는 척 하더니 훈장의 귀에 시험의 답안지에 대해 정보를 알려 주고, 주머니에서 약간의 돈을 내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친구 정보는 추호도 틀리지 않으니, 정답을 그렇게 써서 제출하면 분명 합격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돈으로는 시험 전 날, 원기를 돋우워 시험장에 나오시라는 뜻에서 돈을 드리니 이 돈으로 고깃국과 쌀밥으로 배부르게 먹고 시험장에 나가시면 반드시 합격할 것입니다.”
숙종은, 돈을 한사코 사양하는 훈장의 방바닥에 돈을 놓고 대궐로 돌아갔다.
다음날 오시(午時)에 대궐 정문 쪽의 게시판이나 대로의 게시판에 임금님이 특별히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서만 시행하는 특별시험인 전시(殿試)가 있다는 소식과 날자와 시간이 적힌 대자보(大字報)의 방문(榜文)이 붙여졌다. 벽보를 본 훈장은 어제밤 찾아온 선비의 친구가 대궐속의 정확한 정보통이라는 것에 혀를 내두루며 감탄했다. 그는 미리 알려 준대로 답안지를 연습하여 만들어 제출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학수고대 하던 과거 시험 전날이 되었다. 훈장은 변복한 숙종이 준 돈으로 쌀을 사고, 푸줏간에 가서 한우 고기도 듬뿍 사왔다. 내일 역사적인 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원기회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배부르게 먹어두자는 생각이었다.
시험 날, 숙종은 자신은 왕의 신분으로서, 훈장은 전시에 특채된 관인(官人)으로서 상면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기대했던 훈장은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훈장의 제자가 대신 나타나 숙종이 미리 알려준 정답의 답안지를 제출했다. 숙종은 훈장의 제자에게 사연을 하문하니 훈장은 시험전날 원기회복을 위한다는 취지에서 소고기 국을 너무 많이 먹어 급체(急滯)와 설사가 발생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일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숙종은 도저히 운이 없는 선비를 슬프게 보고 이렇게 독백했다.
“역시 세상만사는 다 정해졌는가!”
나는 반전(反轉)의 결론을 쓰고 주장한다. 부지기수(不知其數)의 남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정해진 운명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고, 나는 슬퍼하며 탄식한다. 그러나 내 스스로 전쟁에 지은 인과법이 현생에 엄고(業苦)로 나타나듯이, 내 인생의 행과 불행은 내 책임이 50%라는 것을 통찰하고, 진력해야 한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대부(大富)는 유천(有天)이고 소부(小富)는 유근(有勤)이라는 말은 세상의 영원한 불변의 진리라고 나는 거듭 주장하는 바이다.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