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리게 하려면 먼저 펴줘야 하고, 약하게 만들려면 먼저 강하게 해줘야 한다. 끊어 없애려면 먼저 흥하게 해주고, 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 책략은 ‘잡고 싶거든 풀어주라’는 ‘욕금고종(欲擒故縱)’과 가깝다. 그 기원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36장에 나온다.
이 말이 의도하는 바는 적이 강력할 때 또는 상대의 진면목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거나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고 있을 때는 성급하게 힘겨루기를 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적의 의지가 교만 방자해져 경계심을 늦추고 해이해졌을 때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때 비로소 행동을 개시하여 승리를 거두라는 것이다.
동주(東周)때(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256년까지로 흔히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정나라 장공(莊公)이 언(鄢)에서 단(段)을 물리친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공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공숙단(公叔段)이 내외 세력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음모를 일찌감치 눈치 챘다. 그러나 그는 공숙단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숙단의 근거지에 성을 쌓는 것을 허락 하는 등 공숙단의 일련의 준비 공작을 모르는 체했다.
어머니 강씨는 장공에게 동생 공숙단을 수도에 봉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자 여(呂)가 극구 말렸으나 장공은 태연하게 “어머니께서 바라는데 그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내가 편치 못하지요”라고 했다. 또 공숙단이 병사를 모집하고 말을 사들여 훈련시킨다는 보고를 받고도 공숙단이 나라를 위해 군사를 훈련시킨다며 짐짓 그 노고를 치켜세웠다. 공숙단이 수도 부근의 작은 성 두 개를 점령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공자 여가 출병을 권했으나 장공은 그저 “의롭지 못한 행동을 많이 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망치게 되어 있으니 기다려봅시다”라고 말했다.
공숙단과 그 어머니의 음모가 완전히 드러나자 장공은 그제야 “자! 이제 그들을 수습하자!”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해두었다가 공숙단과 어머니 강씨가 거사할 때 과감한 조치로 음모를 분쇄했다. 공숙단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어머니 강씨는 성영(城穎-지금의 하남성 임영현 서북)으로 귀양 보냈다.
‘경보(慶父)가 죽지 않으면 노나라의 재난은 끝나지 않는다(慶父不死, 魯難未已)’는 유명한 고사성어는, 경보는 죽어서도 그 죄를 씻을 수 없는 백 번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성어다.
노나라 장공(莊公) 만년에 그의 배다른 형 경보가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임금을 살해하고 내란을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경보는 자객을 사서 공자 반(般)을 죽이고 겨우 여덟 살 난 민공(閔公)을 왕위에 앉혔다. 실권은 물론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민공은 제나라 환공의 외손자였으므로 환공에게 도움을 청했다. 환공은 상황을 파악한 후 병사를 보내 경보를 제거하려 했다.
이때 대부 중손추(仲孫湫)는 경보가 다시 나쁜 짓을 하길 기다렸다가 죽여 없애자고 건의했다. 얼마 있지 않아 경보는 자객을 시켜 민공을 암살했고, 분노한 백성들이 경보의 집을 포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나라 환공은 3천 명의 군사를 보내 공자 신(申)을 왕으로 세웠다. 경보는 잡혀 압송되는 도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나라 장공과 제나라 환공이 취한 수단은 상대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충분히 행동을 드러낸 다음, 즉 사태가 극단으로까지 발전하여 반대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할 때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 단숨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처음에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둔 것은 기회를 기다려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으로, 결정적 행동을 취하기 위한 말하자면 땅고르기나 숨고르기 작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