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고난의 수행에서 그들이 과연 그 무엇을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일까?
남방불교(南方佛敎)는 동남아시아의 불교. 아소카왕 이후 남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인도네시아 등지에 전파되어 있는 소승 불교이고, 북방불교(北方佛敎)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인도의 아소카왕 때부터 발달하여 한국, 티베트, 중국, 일본에 퍼진 불교. 대승 불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남방불교(南方佛敎)는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 유포되어 있는 남방상좌부(上座部)의 불교, 베트남(안남安南)에서 행해지는 유(儒), 도(道) 2교와의 혼성불교, 캄보디아 지방에서 과거에 번영을 누린 크메르 민족의 불교,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예전에 유포된 남해불교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남방불교는 한마디로 현재 동남아시아에 있는 여러 국가들 중에서 베트남을 제외한 불교국가의 불교를 말한다. 이에 대해 북방불교(北方佛敎)란 인도로부터 흔히 서역(西域)이라고 칭하는 실크로드의 주변을 거쳐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 등 북쪽으로 전해진 불교를 가리킵니다. 이는 물론 지역적인 차이에 따른 구별이지만, 그 성격은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인도불교는 크게 두 가지의 언어로 전파되었습니다. 부처님 자신은 일반 민중을 위하여 당시의 유력한 방언으로 설법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의 전통을 따라 처음에 불전은 팔리어라는 방언으로 전수되었다. 그러다가 인도철학의 융성 등 사회적 추세에 발맞추어 전통적 고급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에 의해 불전이 전수되었다.
인도 대륙을 벗어나 불교가 맨 처음 해외로 전파된 것이 현재의 스리랑카인데, 이 불교는 팔리불전으로 전수되었다. 그래서 팔리어의 불전을 소위 남방불전이라 한다. 또 남방으로 일부 대승불교나 밀교가 전해지기도 했지만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보수적인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였기 때문에, 남방불교를 상좌불교라고도 한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질 당시에는 부파불교시대였고, 나중에 부파불교는 소승이라고 비난되었으므로, 남방불교의 특징을 소승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이 정통임을 자처하고 있다.
인도 본토로부터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 마힌다Mahinda(摩呬陀)에 의해서였다. 미얀마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4∼5세기경으로 보이며, 공식적으로 남방상좌부불교를 채택한 건 1058년 아나우라타Anawrāta 왕 때이다.
타이 왕조는 12세기 이후 상좌부불교를 채택하고 1361년 스리랑카 상좌부 대사파(大寺派)의 법등(法燈)을 국가적 종교로 받아들였다. 캄보디아, 라오스가 상좌부불교를 수용한 건 14∼15세기 타이민족에 의한 북방정략(北方征略) 후의 일이다.
남방상좌부는 계율을 엄수하는 원시불교 이래의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팔리 문헌에는 잘 정리된 경률론(經律論)인 삼장(三藏) 외에, 방대한 주석서, 복주(復註), 강요서(綱要書), 사서(史書), 문법서, 시서(詩書) 등이 있어 불교연구의 보고(寶庫)를 이루고 있다.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 늘리 유포된 “남방불교?”
미얀마는 버마에서 독립한 나라로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를 믿는 나라로 한 집에 한 명 이상은 스님이 있다고 할 정도로 어딜 가나 샤프란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의 삶에 깊이 불교가 들어 와 종교적인 태도가 불편함을 앞선다. 필자는 처음 미얀마에 꼭 여행을 한번쯤 가봐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성실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어중간한 신자로서 방송뉴스와 어느 사진첩에서 줄선 탁발승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느끼며 감명깊게 봤던 수많은 승려들의 구걸 행렬 때문이었다.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미얀마를 여행하다보면 누구나 진기명기 하나로 볼수있는 것 중 하나가 수도 양곤의 새벽을 깨우는 대표적 위파사나(밀교와 소승불교의 중간) 수행도량인 ‘마하시 수도원’의 일대는 열대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빗줄기로 안개처럼 흩어진 새벽공기는 늘 서늘하다는 것이라 했다.
새벽 6시 조용한 수도원을 흔드는 요령소리에 자주색 가사를 걸친 스님들이 발우(그릇)를 하나씩 안고 수도원 입구로 모여 한 줄로 늘어섰다. 묵언 가운데 선 까치의 울음소리만이 우렁차다.
6-70여명의 승녀들이 삼삼오오 줄을서서 모이자 나지막이 경전을 암송하기 시작한다. 이내 이들의 행렬은 탁발을 위해 수도원을 빠져 나갔다. 남방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 필요한 모든 것을 보시(사찰이나 승려에게 물품을 제공한은 일)에 의존하는 걸승(거지스님)의 삶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승녀들의 출발이 탁발이다. 그들이 지닌 것은 말 그대로 가사 한 벌과 얇은 플라스틱 발우 하나뿐이다. 이들은 수도원에 모여 수행에 전념한다. 사찰이나 사원을 소유하거나 운영하지도 않는다. 돈과 관련된 모든 일로부터 격리돼 있다.
미얀마 승려들이 이같이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지금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전국민의 90%에 이르는 볼교 신자들의 독실한 후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탁발 행렬이 동네 어귀로 접어들자 중년 부인 하나가 작은 솥단지를 들고 맞이한다.
주걱으로 밥을 퍼 걸어가는 스님들의 발우에 한 주걱씩 능숙하게 담아준다. 스님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도록. 마하시 수도원의 경우 스님 한명에 신도 두 명이 후원인으로 등록해 칫솔에서 비누까지 모두 제공해주는 것이 관행이다.
스님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오는 신도들이 줄을 잇는다. 승려가 아니더라도 미얀마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출가(出家)경험을 한다. 보통 경험이 많을수록 존경받는 사회가 미얀마다.
탁발승들이 떠난 수도원 마당. 비구니들과 일반 수행자들이 경행(걸으면서 하는 수행)하는 모습이 슬로비디오 같기도 하다. 위파사나 수행은 앉아서 하는 참선과 경행을 반복한다. 경행하는 수도자는 자신의 발과 몸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몸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보고, 그 속에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위파사나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고, 또 깨달음을 얻기 위해 더 효율적인 길이라 남방불교를 ‘근본불교’로 불러야 한다고 미얀마 사람들은 말한다.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의 남방불교에서 행해지는 승려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 흔히 북방의 대승불교와 대비해 소승불교로 대비해 소승불교로 불려온 남방불교식수행이 부처님의 가르침, 원시불교의 행태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수행법이 ’위파사나‘다. 위파사나(위빠사나, 위빠싸나, Vipassanā, विपश्यना, 觀, Vipaśyanā) 또는 관(觀)은 불교의 명상법이다. 고대인도어로 ’바로 본다‘란 의미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세밀히 들어다 봄으로써 번뇌에서 벗어나는 수행법을 말한다.
위파사나 수행의 본 고장인 미얀마엔 이천오백년 전 불교가 살아 숨쉬고 있는 듯했다. 발우 하나만 들고 수행에 전념하는 남방불교의 진수, 식사 물품 등 모든 것을 보시에 의존하며 부처수행원형에 가깝게 하는 무송유의 삶. 스님 1명당 신도 2명꼴 후원으로 坐禪하며 맨발로 걸으며 徑行을 종일 반복하는 수행을 실천하는 미얀마의 마하시 수도원의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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