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9월이면 빚어지는 상록야학 상록은 학비가 없다.
"선생님, 이 나이에 공부가 될까요? 선생님, 저는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요."
"하다보면 다 됩니다. 그냥 학교에 열심히만 나오세요. 몇 달 지나면 공부가 익숙해 지십니다."
해마다 9월이면 빚어지는 상록야학 신입생 교실 풍경이다. 그런데, 진짜 몇달 지나면 다 따라오신다. 이유가 뭘까? 상록야학은 학비가 없다.
그냥 공부하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부지런히 나오면 된다. 책값과 학급 공동체 운영을 위한 공동비용 등 약간의 부대경비는 있지만, 부담이 갈 정도는 아니다.
이것까지 다 지원해드리면 좋겠지만, 후원금과 약간의 공공지원 예산으로 꾸려가는 야학 예산은 그정도까지 풍족하지 않아서 안타깝다.
선생님들은 모두 자원봉사로 나온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가르칠 생각이 없는 분들은 아예 이 학교 선생님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런 선생님과 학생님들이 만나서 공부가 안되면 그게 더 이상한거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는 '공부'를 넘어 '학교를 배운다'. 학생 대부분은 가정형편으로 배움을 놓쳤거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형제자매 뒷바라지에 배움의 시기를 놓친 어르신들이 많다.
이 분들이 평생 가졌던 한결같은 아쉬움과 소망은 "나도 번듯이 학교에 가고 싶다"였다.
매년 4월에는 휴일 하루를 골라 야외에 나가서 백일장을 여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택하는 소재는 연로하거나 이미 작고하신 부모님을 추억하거나, 청소년 시절 중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훔쳐보며 남몰래 부러워하고 마음아파 했던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 분들은 오십줄, 육십줄에 만나서 동문수학하는 급우들을 너무나 아끼고 위하신다. 학교에서 마냥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체육대회, 소풍, 수학여행, 연주회 관람 등 주어지는 계기 수업도 가끔 병행되므로 이곳에서 비록 늦었지만 학교를 배우시는 것이다.
"선생님, 저는 전철을 타고 출근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상록야학에 꼭 다니고 싶었는데, 학교가 없어진 거에요. (상록야학은 원래 위치했던 회기역에서 몇년전 현재의 이문동으로 옮겨 왔다.) 내 팔자에 학교는 없나 보구나 생각하고 포기를 했는데, 어느날 동네 전신주에 상록야학 신입생 모집 공고가 나붙은 거에요. 그날로 전화해서 바로 입학 등록을 했죠."
며칠전 야간 수업을 마친 후 신입생 모집 전단지를 붙이러 나간 중학교 과정 한 어머니가 함께 동행한 기자에게 들려 준 이야기다.
그 분은 심지어 기자가 이미 전단지가 붙은 골목으로 계속 들어가자, 이러다 한 장도 못붙이고 집에 가겠다고 빨리 다른 지역으로 옮기자고 성화까지 부리셨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 야학에 와서 3시간을 공부하는데, 그러고 남은 1시간에 신입생 모집 공고를 한장이라도 더 붙이고자 서두르는 저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점수를 매기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눈치보며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재밌는 경우도 많다. 이미 졸업하신 한 어머니는 아들을 교사로 키우셨다. 중학교 국어교사가 며느리로 들어왔다. 시어머니 사연을 들은 그 며느리가 이 학교 자원봉사 선생님으로 몇년을 나오시다 출산을 앞두고 그만 두신 일이 있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기자와 함께 신입생모집 광고지를 붙였던 학생분은 처음 학교에 나올때 아들로 부터 나이드셔서 뭐하러 가시냐는 질문을 받았단다.
그냥 웃어주고 계속 다녔는데 "어머니, 조금 다니다 그만두실 줄 알았는데, 두달을 지켜보니 그 정도면 다니시겠네요. 필요한 건 뭐든지 말씀하세요."하더란다.
한 어머니는 아들이 중학교 체육선생님이다. 반에서 연세가 제일 많다. 젊은 동창들 공부를 못따라가겠다며 푸념이 많으시다. 지난해에는 그 아드님이 체육부장으로 있는 중학교의 체육관을 빌려서 쾌적한 환경에서 체육대회를 치렀다.
이 분들을 바라보면 그저 마음에 드는 생각은 존경 뿐이다. 상록은 그렇다. 서로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곳이다. 늦은 공부의 설움과 학교에 못간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보듬으며 함께 공부하는 곳이다.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님이 함께 감사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이 더 많이 배우고 간다며 눈물을 흘리는 곳이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상록야학이 8월 하순까지 2018년 신입생을 모집한다. 대상은 중학교 40명, 고등학교 40명이다.
지난 1976년 개교해서 올해 입학하는 신입생들은 중학교 44회, 고등학교 34회가 된다. 대개가 가정형편 등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로 40대~80대까지 다양하다.
가끔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젊은 학생들이 입학하기도 한다. 현재 100여명의 학생과 30여명의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정성을 모아 함께 꾸려가고 있다.
자원봉사 선생님의 구성은 다양하다. 대학 재학중 공부시간을 쪼개가며 봉사활동을 하다가 취업과 함께 '前 교사'로 이름을 바꾸는 선생님들도 많고, 정규학교 선생님이 야간을 이용해 봉사하다가 본인의 유학 등을 위해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직장에서 은퇴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찾고자 봉사하는 대학교수급 선생님도 계시고, 칠십노구에 가끔씩 체력이 감당되지 않아 다른 선생님의 대체 수업을 요청하면서도 20여년째 봉사를 멈추지 않는 원로 선생님도 계신다.
수업과목은 중·고등학교 정규과정 교과목과 교양과목이다. 졸업장은 수여되지만, 별도의 검정고시를 치러 학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검정고시에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검정고시는 1년에 4월, 8월 두차례 시험을 치른다. 지난해의 경우 4월 중졸 검정고시에서 중3반 전원이 합격을 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수업을 들어가보니 한 분이 합격이 안됐다는 것이다.
예비 고교과정 수업준비를 해갔는데 당황스러웠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한 분이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 분만 초졸로 남겨둘 수 없어 전체 급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분 한분을 위한 복습 및 검시대비 과정으로 다시 전환했다.
물론 8월 중졸 검정고시에 당연히 합격했다. 한 분은 4월 검정고시가 끝난 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8월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독학으로 준비해서 4개월만에 고졸 검정고시를 거뜬히 패스한 것이다. 너무나 뿌듯하고 으쓱거려지는 순간이었다. 수업은 매년 9월부터 시작되며, 저녁 7시 20분부터 야간 3시간 수업으로 진행된다.
상록야학의 중학과정은 방학이 없는 주5일 수업으로 8개월마다 1학년씩 진학해 2년동안 3년 과정을 마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고등학교는 중학교 2년 과정의 튼튼한 기초를 믿고 지난해 부터 1년 단기 졸업과정으로 바꿨는데 막상 적용해보니 교사, 학생 모두 어려움이 많아서 다시 2년 과정 환원이 검토중이다.
기자가 초보 교사시절 검정고시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 분께 이 나이에 졸업장(합격증)이 왜 필요하냐고 속없는 질문을 드린적이 있다. 평생동안 직장에 이력서를 낼 때 최종학력과 졸업증명서 제출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아픔도 읽지 못하면서 무슨 야학 선생님을 하느냐고 자책한 일이 있었다. 이분들께는 졸업장 못지 않게 검정고시 합격증이 참 중요하다.
서울특별시 20세 이상 인구 785만명 중 국가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중학교 학력미만 성인인구는 68만명으로 전체의 8.7%에 달한다.
아직도 주변을 둘러보면 표내지 않을 뿐 학력 컴플렉스를 남몰래 지니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독자들께서 이 글을 읽으신 후 주변을 둘러보고 혹시 필요한 분이 계시면 꼭 용기내서 도전하시라고 적극적으로 권할 것을 부탁드린다.
아마 과정을 마치고 나면 크게 만족하고 고마와 하실 것이다. 상록야학과 거리가 가까운 곳에 거주하면 당연히 상록으로 오시면 되고, 거리가 먼 경우라면 그 지역에 알아보면 상록 비슷한 야학이 그곳에도 있을 것이다.
찾기 어려우면 상록에 문의하고 도움을 청해도 된다. 다만, 자원봉사 운영이어서 주간 교무실 상근직원은 없다. 따라서, 전화문의는 저녁 6시이후 교육과정이 운영되는 시간에만 통화 및 상담이 가능하다.
[취재 조장훈 나눔일보 대표 편집 추광규 기자]